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주 부부가 함께하는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부부가 생활에서의 갈등으로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모임을 진행하시는 분(‘청송’이라는 별칭을 사용하셨다)이 ‘사랑의 반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증오, 미움, 질투, 무관심 등 다양한 단어들이 나왔다. 미움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생기는 감정이기에 필자는 무관심에 한 표를 던졌다. 필자의 아내가 아이들한테 관심을 가져달라며 가끔 하던 말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좀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이라고 변론했다. 바쁜 일상으로 아내만큼 자녀에게 신경 쓰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분명 필자는 자녀들을 사랑한다. 그러고 보니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는 아닌 것 같다.

증오는 어떨까? 미움의 감정을 넘어서 때로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감정이 사랑의 반대말 일까? 가끔 서로 죽일 듯이 증오하던 관계의 사람들이 어떤 계기로 일순간 좋아지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부부, 부모자식 또는 형제 관계에서도 증오하면서 사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사소한 오해로 미움의 감정이 생기고, 이것을 풀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서 원망과 증오로 변한다.

필자도 어린 시절 이웃집 아저씨에게 증오의 감정으로 살아왔던 경험이 있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실컷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 증오의 감정 속에도 ‘서로 잘 지내고 싶은, 상대가 나에게 진심으로 용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런 일방적인 증오의 감정은 나는 힘들지는 모르지만 상대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랑의 반대라고 하기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청송님의 답변의 의외였다. 사랑의 반대는 ‘나의 의(義)’라고 했다. ‘내가 옳고, 나의 기준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과 내세움으로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사랑의 반대됨이라고 한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의 배우자나 자녀들을 대할 때 ‘내 기준과 잣대’로 대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며,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내가 옳다고 주장해서 다투거나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사랑의 반대라고까지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 청송님은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 것 같으냐? 라는 질문으로 답을 대신 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않는 것은(못하는 것이 아니라 않는 것) 분명 사랑의 감정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딸이 바람을 피우고, 이혼을 당하고 쫓겨나서 집으로 오면 부모는 받아준다. 그런데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돌아오면 받아주지 않는다’ 라는 말과 실제 그러한 실화들은 어떤 것이 진짜 사랑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비유가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모든 일에서 ‘나의 기준이 옳고, 그것에 따르라고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나의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는 무서워서든 귀찮아서든 힘이 없어서든 따르지만 불만과 미움의 감정으로 힘들어 진다. 나는 편하지만 상대는 힘들기 때문에 ‘나의 의(義’)가 사랑의 반대라는 것인데, 설명을 듣고 보니 맞는 것 같다. 문제는 필자가 그동안 너무 많이 의(義)를 내세우면서 살아왔고, 이것이 매우 잘못된 것임을 인정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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