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며칠 전 필자의 아내가 카톡으로 유튜브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오늘 나는’이라는 기독교 성가였다. 전에 들었던 노래였지만, 그 날은 유독 필자 자신을 두고 쓴 가사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중략)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 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라는 가사이다.

우리는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면서 많은 실수나 잘못을 한다. 그 일로 미움과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주기도 한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다르게 유지된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할 일 보다 용서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 또한 그렇다.

그런데 이 생각은 매우 큰 모순임에도 우리는 잘 모른다. 용서를 ‘구해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은 돈을 꾼 금액과 빌려준 금액이 맞아야 하듯이 그 양이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용서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라면서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는 말을 잘 해야 한다고 교육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말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어렵지만 그렇게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내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서 그 용서를 받으면, 그 잘못은 쉽게 잊혀지거나 평소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용서하겠다고 말한 당사자는 그 일을 웬만해서는 잊지 못한다. 진심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불쑥불쑥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미움 감정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다.

웹스터 사전에서 용서란 ‘분노를 느끼는 것을 그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떤 책에서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독을 만들어 내고, 그 독은 품은 사람 자신을 삼켜 버리며, 우리의 삶 가운데서 즐거움과 평안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용서를 구해야 할 일 보다 용서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진짜로 용서하지 못한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용서한다고 말해놓고 속마음은 계속 배상을 바라고 있고, 용서한 것에 대해 억울함이 남아 있다. 이것은 용서를 해 줄 때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나의 속상했던 마음과 분노’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픈 내 마음을 상대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울함이 가시질 않는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잘못을 한 상대가 아니라 나를 정말 사랑하시기에 한 말씀인데, 우리는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고, 여전히 평안을 빼앗기며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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