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딩동”

문자 알림 음이 한가로운 낮 시간의 정적을 깬다.

 

책상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둔 핸드폰을 집어 든다. 열에 아홉은 불필요한 광고 문자이겠지만 심심한 낮 시간엔 그 마저도 관심이 갈 때가 있다.

핸드폰을 내려놓다 문득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들을 훑어본다.

자음 순으로 저장된 번호들이 몇 페이지를 넘기고도 끝없이 이어진다.

한때는 나와 인연이었던 또는 현재 인연을 맺고 있는, 그리고 어쩌면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 질수도 있을 인연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대부분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번호들이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내 성격 탓에 저장 공간은 포화상태가 되어 있었다.

기왕 생각이 난 김에 기억이 미치는 이름까지만 두고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두 번 가봤던 음식점부터 병원, 보험회사, 가르치던 학생들, 학부모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기억에도 없는 이름들…….

한참을 정리해나가던 중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현수’

몇 년 전 하늘나라로 급히 떠난 초등학교 동창 녀석이다.

‘연락처를 삭제할까요?’

‘예’ 와 ‘취소’ 사이에서  망설이던 나는 결국 ‘취소’를 누르고 다시금  공간 깊숙이 그 녀석을 저장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을 번호이고 연락을 주고받을 일도 없는 번호이지만 삭제를 함과 동시에 내 기억 속에서 친구를 영원히 비워내는 듯해 내키지 않았다. 아직은 좀 더 간직하고 싶었다. 그 녀석과의 인연을 그리고 추억을…….

우리 집 낮은 돌담 너머로 한눈에 보이는 곳에 현수네 집 대문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그 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우리 집과 그 애의 집은 몇 세대를 걸쳐 한동네서 같이 살아왔다. 현수가 태어나고 3일후 내가 태어났다.

앞뒷집에서 현수와 나는 친구로 때론 경쟁자로 자라왔다. 어른이 되고 각자 결혼을 하고나서 또 우리의 아이들이 친구로 자랐다.

출세한 동창, 동네의 자랑…….

그렇게 평온한 듯 우리는 인생의 길을 가고 있었다.

“잘 지내지?”

한 달에 두어 번 어떨 땐 몇 달에 한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우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늙어가고 있었다.

“잘 못 지내.”

여간해서 약한 소리하지 않는 자존심 강한 현수가 보내온 답이었다.

 우리 나이에 겪을 수 있는 사업상 문제 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두 어 달 후 “병원이야. 항암치료 받으러…….”

짧은 답장이 스며들 듯이 핸드폰에 떴다.

상계동 백 병원 11017호를 찾았지만 11017호는 없었다. 이미 정신마저 혼미해진 현수는 1017호를 11017호로 적어 보낸 것이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적처럼 현수가 누워 있었다. 90킬로를 육박하던 몸체는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야위어있었다. 하루에 몇 번 잠시 정신이 들었던 그 시간 우리를 알아보고 움푹 패인 보조개를 지으며 미소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틀 뒤 현수는 짧은 세상과의 인연을 접었다. 투병생활  6개월 째 되던 날이었다.

우리들은 시간이라는 평행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듯 살아간다.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를‘찰나’라고 한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시간을 ‘탄지’라고 한다.

숨 한번 쉬는 시간을 ‘순식간’이라 한다.

헤아릴 수 없이 길고 긴 시간을 ‘겁’이라고 한다. 국어사전 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그 다음 개벽을 할 때까지의 동안을 ‘겁’ 이라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43억 2천만년을 ‘한 겁’으로 말하기도 한다.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불교에서는 ‘겁의 인연’으로 표현한다.

2천겁의 세월이 지나면 하루 동안 동행하는 인연으로 만나고 6천겁의 세월을 넘어서야 이웃의 인연으로 만난다고 한다.

현수가 떠난 지 3년, 6천겁의 인연은 몇 년 사이에 시간 속으로 희끄무레하게 바래져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겁의 시간을 거쳐 온 또 다른 인연들과 스치며 살아가고 있다.

이미 허공 속으로 사라진 전화번호들이 블랙홀처럼 과거의 시간과 함께 회오리치듯 흩어졌다.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 무연대면불상봉(無緣對面不相逢)이라한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서도 서로 만나고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대하고도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한다.

스치는 작은 인연 하나도 가벼이 여겨지지 않는다.

‘인연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운명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이 나이쯤에는 남겨진 시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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