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산불 감시 초소부터는 등마루를 타고 여유 있게 걷는다. 등마루는 내리막길도 있지만 오르막길이 더 많다. 비교적 평탄한 숲길이라 힘들지 않았다. 우리 내외는 숨이 가쁘지 않으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루하지 않은 산책길이었다. 사람들이 환산을 겨울에 많이 찾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환산은 겨울 전망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녹음이 우거지니 등마루에서 산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활엽수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대청호가 그야말로 절경이다. 안개가 뿌옇게 끼긴 했어도 대청호반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부소담악 병풍바위가 다 내려다 보였다.

고리산 봉수대 터에 이르렀다. 여기가 제3보루이다. 해발 523m, 산봉형 석축 산성이고 둘레 약 100m라고 표지석이 설명한다. 옥천 이원의 월이산에서 보내는 봉수를 받아 대전 계족산으로 보내던 봉수대 터이다. 계족산에 올랐을 때 환산이 마주쳐 뚜렷이 보이던 기억이 난다. 자연석으로 쌓은 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무너져 돌무더기가 된 곳도 있고, 그 시대 사람들이 쌓은 흔적이 잡목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넓이도 꽤 넓고 산 아래쪽인 남측에서 바라보면 높은 성곽처럼 보이지만 올라서서 보면 아주 평평한 마당이다. 노천에 여기저기 쌓아올린 돌담은 최근에 사람들이 그렇게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잡목과 흙에 묻혀 감추어진 성곽의 흔적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납작납작한 자연석이 정교하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보더라도 꽤 높은 성벽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잡초가 우거진 주변을 살피다가 기와조각 한 장을 발견했다. 빗살무늬가 있는 기와조각이다. 기와는 곡선이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쾌 큰 것으로 보인다. 깨진 부분은 붉은빛이 섞인 검은색이다. 붉은 진흙으로 구워서 만들었는지 굽는 과정에서 색깔이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기와 제작연대를 짐작할 수 있으면 건물이 어느 시대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가 수시로 주인이 바뀌었던 곳이니 매우 중요한 고증자료가 될 것이다. 봉화가 국가 방위에 큰 역할을 했던 조선 시대에 건물일 수도 있다. 내가 만지고 있는 와편에서 조선을 읽어야 할지 백제를 읽어야할지 모르겠다. 역사는 아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나의 무식이 답답하다. 와편 몇 조각이 더 보였다. 이렇게 쉽게 와편을 볼 수 있는 것은 꽤 큰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와편을 주워 들여다보면 옛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성돌을 쓰다듬으면 1500년 전 사람들과 손을 잡는 기분이다. 그런데 선인들의 문화적 안목과 손재주에 감탄하기보다 자꾸 측은함에 가슴만 아파오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성은 마루를 향하여 길게 마치 마늘 조각 모양으로 이어졌다. 남쪽은 뭉툭하고 정상 쪽으로 점점 좁아지는 형태이다. 정상 쪽으로는 성곽 위가 길처럼 되어 있다. 이곳에서 지금부터 1500년 전에 세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를 죽이고 공격하고 속이고 했던 인간사가 있었다는 것이 신비롭다. 여기에 동원된 서민들은 또 얼마나 고충이 심했을까? 여기 주둔하여 밤을 지새우면서 어린 병사는 부모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나이든 군인들은 또 얼마나 자식을 보고 싶어 했을까? 사람들은 왜 예나 지금이나 이런 규범과 권력의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자신을 거기 묻어버리고 얼마 되지도 않는 일생을 괴롭게 지내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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