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두드림은 생명의 시작이다. 봄 햇살은 겨울의 끝자락을 몰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언 땅을 두드린다. 그의 끈질긴 두드림에 못 견뎌 겨울은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제 갈 길로 간다. 겨울이 떠난 자리, 대지의 심장 속으로 들어간 햇살은 봄의 속성인 생명을 불어넣음으로 온 천지가 초록으로 빛나기 시작하고 꽃을 피운다.

 

장인의 혼이 깃든 한 점의 빛나는 유기도 두드림에서 시작된다. 놋쇠와 구리를 비율에 맞게 섞은 뒤 불에 달궈내 덩어리를 만들고 원하는 형체가 될 때까지 두드리고 달구기를 반복하며 셀 수 없을 만큼의 땀방울을 쏟아내고 혼을 불어 넣는다. 꽹과리와 징의 공명이 심금을 울리는 것은 두드림을 통해 소리잡기가 제대로 되었을 때라야 가능하다. 온전히 빚어져 사물이 투영 될 정도로 맑은 유기를 바라 볼 때면 찬란한 아름다음에 숙연해진다. 얼마나,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빚어야 긴 여운을 남기는 아름다운 소리, 한 점의 빛나는 유기로 거듭나는 것일까 싶어서다.

우리의 삶 또한 두드림의 시작이다. 사랑도 두드림에서 비롯된다. 심장이 뜨겁게 두방망이질 쳐 주체할 수 없을 때 불꽃이 튀고 그 열기가 사랑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 그대로 있을 때는 개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로 만나 마음이 닿을 때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 세상은 두드림에 의해 시작되고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인간의 성공여부도 주어진 삶의 부분들을 얼마나 정성껏 두드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삶의 길목에 도사리고 있는 굴곡진 것들, 울퉁불퉁한 부분들을 반듯하게 펴려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굽은 채로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오래된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다듬이질을 하고 있다. 푸새를 곱게 한 뒤 수차례에 걸쳐 발 다듬이 질을 하고 마지막으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자근자근 두들긴다. 이때 다듬이질 소리가 고운 음률을 내야 푸새 감의 주름진 곳이 곱게 펴진다. 그러나 때로는 소리가 엇박자를 내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푸새감이 미어지곤 했다. 왜 그럴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어머니와 내 마음이 하나가 되어져야 방망이 소리가 음률이 되고 푸새감이 비단결 같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느 시점에서의 내 삶도 그랬었다. 소년의 때에서 청년의 때로 들어 설 무렵 세월이 왜 이리 더디 가나 조바심했었다.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 했다. 빨리 졸업을 해 제복을 벗고 넓은 세상을 활보하고 싶었다. 그 때는 제복이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를 생각지 못했다. 지켜야하는 규범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규범들이 나를 보호해 주는 장치였고 풋콩처럼 싱그러웠던 그 때가  내게 있어 빛나는 시절이었음을 훗날에야 알 수 있었다.

제복을 벗고 마주한 세상에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젊음이라고 하는 텃밭에 무엇을 심고 가꿀까. 어떤 그림을 그릴까. 등의 행복한 설렘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꿈을 쫒아 다닌답시고 분주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마음만 분주했을 뿐 내게 찾아온 아름다운 날들을 어떻게 가꾸어야 할까. 를 미처 알지 못한 채 허둥대며 보내느라 알찬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어른이 되면 그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가 따른 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허둥대다가 때로는 시간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베이기도 했다. 세상은 유독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며 시간이 어서 빨리 가버리기만 바랐을 뿐 주름지고 구겨진 부분들을 펴기 위한 두드림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삶이 서툴러서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순간순간 당황해 하는 시점에 서있지만 아직도 내안에는 펼쳐야할 부분이 많음을 실감한다.

  수년 전부터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함께 공감하고 희로애락을 나눈다.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동안 굴곡진 부분을 펼쳐가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용기에 감동해 울고 웃는다. 무엇보다 그들의 삶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끼고 위로받으며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관계를 형성해 가는데 있어서 때로는 발가벗는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내 안에 감추어 두었던 것들을 모두 토해내고 나면 두꺼운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었을 때의 거추장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홀가분하다. 가식의 옷을 모두 벗어버릴 때 비로소 하나가 되어 서로 껴안는다. 마음이 닿는 희열에 감동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남다르고 싶어 하는 속성이 존재한다. 남다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너와 다르다며 우월감에 차 있을 때 주로 쓰여 지는 말이다. 상대성이 내포되어 있어 비교하는데서 부터 시작 된다. 나는 나임을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비교라는 틀에 가두고 닦달하며 전전긍긍한다.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빛나기 위한 두드림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싶다.

진정한 두드림은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잠자는 한 영혼을 깨울 수 있는, ‘두드리라 그라면 열릴 것이다. 라는 말이 존재할 만큼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봄 햇살이 언 땅을 녹여 푸름으로 빛나게 하는, 때깔도 없고 모양도 없는 쇳덩어리를 아름다운 소리로, 찬란한 빛깔로 거듭나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두드림의 본질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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