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점심때 온다던 아들네가 늦을 것 같단다. 프리랜서인 아들은 작업 시간이 늘 들쑥날쑥하다. 급히 보내주어야 할 뮤직비디오 편집이 이제 막바지란다. 결혼 전에도 밥 한 끼 같이 먹기 힘들더니 장가가서도 신혼 살림집이 지척이건만 또 그 모양이다.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남편은 에그 녀석 하더니 TV를 켠다. 툴툴거리지만 아들 기다리기 프로젝트(?)에는 이미 이골이 났다.

음식 차리던 손길을 멈추고 식탁에 앉아 읽다가 접어놓은 ‘어린 왕자’를 펼쳤다. 이즈음 친구들이 ‘어린 왕자’를 같이 읽자고 했다. 이 나이에 ‘어린 왕자’라니! 했는데 한 번 손에 잡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마침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는 대목을 읽을 차례였다.

“길들인다는 게 뭐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밀밭은 내게 아주 근사한 광경으로 보일 거야. 밀밭이 황금 물결을 이룰 때 네가 기억날 테니까. 그러면 나는 밀밭을 스쳐 지나는 바람 소리마저도 사랑하게 될 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인내심이 필요해. (…) 말은 수많은 오해의 원인이 되거든.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 때마다 넌 내게 조금씩 다가오게 될 거야.”

아들네를 기다리며 읽어서인지 저절로 아들과 며느리의 인연이 연상되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학원에서 만나 친구처럼 지내다 결혼까지 하게 된 녀석들이다. 결혼을 앞두고 전화로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를 듣고 잔소리를 했다. 이러다가 이별하는 건 아닐까 했던 기우가 사라지고 이제는 며느리가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미소가 어린다. 나도 어느새 길든 걸까? 매일 먹는 점심, 조금 늦으면 어떤가. 초조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마침내 4시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돼.

심장이 탁 멎을 것만 같았다. 우리를 기다리며 마당을 서성거리던 시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어머니께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어머니는 늘 담을 내다보며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셨다. 아버님이 채근해도 막무가내였다. 좀 일찍 오면 어때서? 우리가 들어서면 막내 시누이는 대뜸 잔소리부터 했다. 아무리 일찍 가도 어머니에겐 늦은 시간이었다.

분가한 후 일요일 아침마다 나는 꼭두새벽부터 아이들을 깨웠다. 추우나 더우나 마당에 서 계실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 점점 깨우는 시간이 빨라졌다.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느라 분주했지만 정작 꾸물거리는 이는 남편이었다. 격무에 시달려 그랬겠지만, 부모님 집에 가는데 뭘 이렇게 서두르냐며 짜증까지 냈다. 흥! 본인에게 본가는 세상 편한 집이었으리라. 하지만 하루 종일 시댁에 콕 박혀 잠만 잘 위인이, 아이들과 놀이동산 한 번 가지 않는 남편이 미워져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어머니, 저희가 8시에 도착한다고 했지요? 안심하고 계시다가 5분 전에 마당에 나와 계셔요. 제발 그렇게 하셔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떡이며 걱정 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 오히려 계면쩍어하셨다. 어머니 건강이 걱정되어 야단들이 났어요. 그냥 웃기만 하셨다. 아무리 다짐을 받아도 늘 원점이었다.

한 번은 작전을 바꿨다. 내일 아이들 데리고 어디 갈 때가 있어요. 아마도 가지 못할 것 같아요. 기다리지 마세요? 아휴 그럼. 아이들 좋은 거 많이 봐야지. 시간 나면 오너라. 못 간다 하는데도 오라니? 혹시 눈치채셨나? 설마 했다. 강박에서 벗어나니 시간을 벌은 듯 마음이 여유로웠다. 깜짝 놀라게 해 드릴 요량으로 부지런히 친가를 향했다. 헌데 어찌 된 일인가? 어머니는 여전히 내다보며 서 계신 게 아닌가! 시누이 말이 그날은 날이 새자마자 나가 기다리셨다는 거였다. 잘하려고 했던 게 오히려 더 고생만 시킨 꼴이 되었다.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 거라고.

그랬다. 어머니와 약속한 시각은 8시였고, 어머니는 한 시간 전부터 나와서 기다렸고, 그 기다림은 마침내 의식처럼 굳어진 것이리라.

마당을 서성이는 동안 어머니는 우리가 꼭 올 것이라는 믿음과 싸우며 안절부절못하셨을까? 한 시간 전부터 정말 두근두근하셨을까?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진정 행복하셨을까!

그때 나는 미처 어머니의 마음을 몰랐다. 다정도 병이야! 하며 어머니의 사랑이 감당하기 힘든 집착처럼 느껴졌다.

비밀 하나를 알려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거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책은 어린 왕자가 별로 돌아가는 마지막 부분을 남기고 있다. 아들네는 오지 않는다. 나는 ‘어린 왕자’를 덮고 베란다를 서성이며 젊은 부부가 걸어 올라올 길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마치 지난날 담장 밖을 내다보며 우리를 기다리던 어머니처럼. 당신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네 장미가 너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여우의 말이 환청처럼 맴돈다. 바쁜데도 뵈러 오겠다는 아들네의 마음이 안쓰러워 오지 말고 편하게 쉬랄까? 하다가도 보고 싶어 언제나 오나 하고 기다려지는 마음. 기다리게 해도 하나도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는 그런 기다림.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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