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물체는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현재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라는 관성의 법칙은 버스를 타고 가거나 운전을 할 때 쉽게 경험하는 물리법칙이다. 관성의 관(慣)은 버릇이 되거나 익숙하여 진다는 뜻이다.

관성은 물리적 현상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쉽게 경험한다. 왼쪽 양말부터 신고, 물을 마신 후 숟가락을 들며, 컴퓨터를 켜서 실행시키는 프로그램은 거의 일정하다. 그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바꾸고자 해도 며칠 지나면 다시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최근 비닐 폐기물 대란, 생활쓰레기 처리문제, 미세먼지 등을 겪으면서 잠시 생활방식을 바꾸어 보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커피숍에 갈 때 머그잔을 가지고 다니고, 버스나 자전거로 출근하며, 천으로 된 쇼핑 가방을 지니고 다니자고 우리는 이야기 했었다. 이제 이러한 상황과 결심은 익숙한 데자뷰가 되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관성은 존재한다. 중학교 3학년 큰 딸과의 왠지 모를 어색한 대화를 해결하고자 시도를 해 보지만 1분을 넘기기 어렵다. 그리고는 다시 이전의 익숙한 침묵으로 돌아간다. 아내가 입에 달고 다녔던 ‘당신은 맨날 똑같다’라는 말이 듣기 싫었지만, 아직도 그 말을 듣고 산다. 부부관계에 대하여 10년 가까이 공부를 했는데도 변한 것을 많지 않다. 인간은 쉽게 변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인가? 지금 우리의 습관이라는 관성은 어디서부터 힘을 가져오는 것일까? 그 원천적 힘을 제거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으면 지금과 미래의 내 모습도 변할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가끔 내 자신에 불만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꿔보고자 배우고 노력해 보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하다 보니 사람은 배운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 보고, 경험했던 방식이 관성의 원천이 되어 지금의 나를 계속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어려서 종이컵, 플라스틱 커피 잔, 택배용 박스, 물티슈, 비닐 팩 등의 일회용품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일회용품이 없으면 비록 불편하긴 하지만 살아가는데 큰 지장을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들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물티슈를 사용했고, 종이컵과 비닐 팩은 이미 오래 전 부터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그들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생활방식으로 살라고 요구할 때 그들은 어떤 마음이 들지 궁금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습관을 길러 주지는 않고 현재의 모습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사회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사회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관성의 근본 힘을 고려하지 않고 지금 바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배는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지만 커다란 유조선은 수 km를 가야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하물면 우리 사회 시스템은 어떻겠는가. 오늘 아침에 혼자 출근하면서 습관처럼 아이들 학교 방향으로 좌회전을 했다. 그런데도  방향을 곧바로 바꾸지 않고, 멀고 막히는 줄 알면서도 다니던 길로 운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습관이라는 관성, 바꾸기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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