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아이가 학교에서 혼이 난 모양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이가 잘못했다. 수업시간에 노래를 불렀으니, 내가 선생님이었다 해도 혼내는 것이 당연하다. 교무실로 오라는 말도 듣지 않았다. 다음 시간이 체육이라 그랬단다. 결국, 담임 선생님 앞에 선 아이는 ‘다른 학생에게 피해주고 그럴 거면 대안학교로 가라’는 말을 들었단다.

한때 대안학교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의 정규교육이 아이의 장래에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대안학교를 졸업해도 검정고시라는 제도를 벗어날 수는 없고 대안학교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대안학교란 무슨 의미일까.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이 가는 곳일까. 평범한 학생의 범주를 벗어난 아이들이 가는 곳일까. 좀 덜렁대고 산만하고 반평균 까먹는 학생이긴 하나 그렇다고 우리 아이가 특별하거나 문제아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은 것 같아 속이 상한다.

나의 학창시절은 아주 평범했다. 중학교 때까지 육상을 한 것 말고는 특출하게 잘하는 것도 없었고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은 좋은 인상으로 남는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는 달랐다. 몇몇 수업 시간은 공포의 시간 같았다. 주먹으로 가슴을 맞으면 숨이 멎는 듯했다. 복싱 선수가 어떻게 국어 선생이 되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잘못 건드린 공이 체육선생님을 향했다고 그 친구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다리에 깁스를 한 채 학교에 와야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선생님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의 폭력이 암암리에 행해지고 묵인되던 시절 나의 고교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왜 그때 말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무서워서 숨죽이고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후회로 남는다. 요즘은 어떨까. 학교에 적을 두고 있지도 않으니 아이의 입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성적이고 성적우수학생이 많아야 학교 명예가 올라갈 것이고 선생님에게도 좋을 것이다. 자유학기제, 방과 후 수업, 봉사활동 등 다양한 대안이 시행되고 있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체감이 가지 않는다.

만약, 나였다면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었을까. 최소한 아이들 하나하나 인격체로 대하고 각기 다른 아이들의 특징이나 성격 등을 존중했을 것이다. 막연한 상상이니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학교 교육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한 인간으로 사회에 나오길 바랐을 것이다. 아마 대안학교의 취지가 이쯤 되지 않을까. 나는 교육정책의 문제 보다 사람의 문제라 생각한다. 교육에 대한 이념, 학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아이들은 모두 똑같다. 모범생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문제아라 낙인찍는 것도 우리 어른이지 문제아는 애초에 있을 수 없다. 4·16 억울하게 희생된 아이들과 선생님을 생각하다 문득, 우리 아이의 교육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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