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석 한국교통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헤르만 헤세는 ‘세계문학 문고’라는 논문에서 세계문학을 읽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문학과 독자의 생기 넘치는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특히 독자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감명을 준 작품을 아는 것이며, 어떤 기준 또는 교양의 잣대 등에 종속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걸작이 상당히 유명하다는 이유로, 모두가 아는 그 작품을 모른다는 게 부끄럽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읽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그 대신 누구나 각자의 성격에 어울리는 작품을 우선 읽는 것, 아는 것,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헤세의 독서론이 특별한 이유는 책을 읽는 최초의 목적이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서 론은 책에서 지식을 얼마나 빨리 흡수하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헤세에게는 지식 습득이 최초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헤세의 이런 생각이 대체로 옳지 않을까. 왜냐하면 실제로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기 자신을 안다’는 말이 무슨 심오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정말 무엇을 갖고 싶은지 확인하는 것이 자신을 아는 중요한 하나이다. 자신이 무엇을 갖고 싶은지 수많은 경험과 인간관계를 통해 제대로 아는 사람도 있다. 거듭된 도전과 뼈아픈 실패를 통해 배우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장점과 약점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사람도 있다. 혹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아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 세상의 찰나적인 풍조에 휩쓸려 유행하는 책이 아니라 보편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고전으로 손꼽히는 세계문학이 쓸모 있다.

화폐가 여러 장소에서 가치를 갖게 된 현대에 와서 인간은 가치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하고도 그것이 정말 잘못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만연해 있다.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성질의 대상을 비교하는 이상한 금전 환산을 솔선수범하여 수행하는 것은 정부와 공무원이다. 그들은 세금을 들여 진지한 얼굴로 전업주부의 노동력이 어느 만큼의 임금에 해당하는지 계산해 발표하기도 한다. 국민들은 그와 똑같은 짓을 흉내 내고 있다.

자신의 모든 생애를 걸 만한 가치를 찾지 않고, 금전적인 가치로 선택을 좌지우지한다. 그들에게 일이란 강제된 고역과 비슷한 것이 된다. 본래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직장에 취직한 대가이다. 자신의 진로를 찾지 못하고, 취직이나 노동 방식을 선뜻 결정 내리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진짜 희망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이해득실과 금전의 가치에만 매달리는 부모를 비롯한 이 세상의 어른들 말을 귀담아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성의 레일이 있고 그 위를 달려야만 한다는 신앙에 몸담아 버린다. 그 결과 금형 틀에 꼭 들어맞는 소시민과 소비자가 생긴다.

독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암시를 작은 목소리로 말해 준다. 어떤 책이 자신에게 해답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책을 다른 사람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혹은 어떤 책이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어울리는가 하는 의미에서 본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해준다. 보통은 10대 때 이런 깨달음을 경험한다. 물론 인생의 맛을 곱씹어 본 40대나 50대가 되어서 비로소 깨닫는다 해도 평생 깨닫지 못하는 경우보다는 훨씬 낫다. 그럴 경우에도 책이 작은 목소리로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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