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
나눔교회 목사·시인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를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슬픈 사연을 간직한 김시천 시인을 보내며 필자는 반성과 함께 그를 추모한다. 그와 만난 것은 1975년 충북대학교 앞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두 사람에게 몹쓸 짓을 했는데 교련 시간에 불러내어 함께 소주 대병을 꺼내어 솔잎과 함께 먹고 취해 솔밭에 누워 잔 적이 있다.

엊그제 참사랑 병원에서 김시천 시인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부음을 바로 듣게 된 것이다. 이 자리는 충북의 인문학광장을 열어가는 초석을 놓기 위해 최초의 조합원들과 강의를 듣고 있는 자리였다.

김시천 시인과 장문석 시인은 우리 고장의 옛말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는 뛰어난 언어를 다루는 시인이다. 그중 한 사람과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의 4·3사건을 다룬 1988년 책의 증보판 출간을 축하하며 온누리 김 사장과 장 시인과 어제 세상을 떠난 시인의 이야기를 했다. 한번은 참사랑 장례식장에서, 또 한 번은 육거리 시장 술자리에서 김시천 시인의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근황을 궁금해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의 부고를 받았다.

김시천은 충북문화운동 4기 의장을 지냈고 전교조 충북지부 제5대 지회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말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나와 함께 젊은 시절을 문화운동, 문학운동을 함께 한 동지이다. 이런 그를 군대생활을 몇 개월 더 하게 만든 장본인이 필자다. 교련을 펑크 내게 한 것이다. 물론 친구인 장문석 시인에게는 더 큰 피해를 입힌 사실 앞에 언제나 미안하게 생각한다.

김시천 시인은 필자 아버지의 친척이었다. 외가였을 것이다. 촌수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의 아버지와 인사를 나눈 대학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형이라고 했다. 그런저런 사연을 가진 그의 아내가 나를 찾아와 아픈 이야기를 할 때도 그는 그의 길을 갔고 시인의 길을 묵묵하게 걸었다. 참교육으로 교사의 길을 택해 갔으며 생전에 정의롭고 건강한 삶을 살았던 시인이다.

2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김시천 시인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좋아했던,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불렀던 재즈의 음악처럼 슬프게 부고의 소식을 알려왔다. 봄바람에 추운 날 세상을 떠났다. 봄옷이 아닌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고 그의 조문을 간다. 오늘 또 하필이면 4월 9일은 인혁당 사건으로 세상의 운명을 달리한 도예종 외 7명이 교수형을 당한 날이기도 하다. 그는 하루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을 병원에 기증한 것 같다. 그래서 만 하루만 조문이 가능한 것 같다.

해마다 4월이 오면 교정에서 어깨를 걸고 시위를 했던 추억의 시인 김시천을 기억 할 것이다.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 청주 ‘문화공간 우리’에서 록큰롤 강의를 다음에 해준다고 한 이상조 음악가의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 이 소중한 지면에 나의 사랑하는 시인에게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평화의 남북정상회담을 기다리고 있는데 슬픈 소식을 많은 분들에게 전한다.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노랫말처럼 우리도 또한 세상을 살다가는 것뿐이다. 힘찬 재즈를 부르며 관을 든 뒤를 따라가는 흑인이 아니라 꽃상여를 따라가며 요령을 흔드는 슬픈 우리네 노래 가락이 울려 퍼지고 있다. 김시천 시인이여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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