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어디서부터 변명의 말을 해야 할까. 만발한 벚꽃에 마음을 빼앗겼다.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고 4월의 강은 여전히 아프건만, 여전히 나의 순정은 나약하고 여리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발발했다. 그들은 왜 무장을 하고 경찰과 맞서야 했을까.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했다. 이에 민·관이 총파업에 들어가며 항의를 했고 미군정은 제주도민을 좌익단체 동조자로 몰아갔다. 조국의 분단을 반대하며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제거의 대상이 된 사람들,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주민들, 공권력은 아이, 어른,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무려 1만4천여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1948년 5월 18일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공포한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빨갱이 몰이에 혈안이 되었고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1960년 4월 19일 3만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권력을 잡은 자유당 정권은 온갖 불법과 부정, 독재와 탄압을 일삼았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전국에서 수천 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했다. 결국 이승만은 물러났고 4·19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뒤이은 정권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독재타도와 부정부패를 외쳤던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그렇게 공권력에 대항하는 자는 모두 빨갱이가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염원한 국민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촛불혁명은 다시 한번 승리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세월호가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는 동안 대통령은 비선실세만 기다렸고 문고리 3인방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바빴다. 국가권력이 국민을 위한 적이 있었던가. 촛불행렬이 청와대로 향할 때 공권력은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생각만 하고 있었다.

1974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88올림픽 호돌이를 기억하는 아이로 자랐다. 나에겐 독재도 민주주의도 세상 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평범한 소시민이 되었다. 적당히 분노할 줄 알고 또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디 하나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일도 드물다. 조력자로, 방관자로 사는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베트남전쟁 이야기나 홍명희문학제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어른들의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지고, 구치소에 수감 중이 두 전직대통령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나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이들의 순정도 조금은 헤아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아프다. 통곡의 강은 4월을 지나 5월을 거쳐 6월로 흐르고 있다. 나라다운 나라, 사람 사는 세상에 살고 싶은 소박한 바람만으로는 내 아이에게 자랑스러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소시민의 변명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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