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옥천읍내 야산에 있는 삼양리토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관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이라는 산성 고리 끝자락에서 갈라진 산성으로 옥천 고을을 드나드는 사람과 우마차를 경계했던 성이다. 용봉산성이나 마성산성이 원거리 경계용이라면, 삼양리토성, 삼거리토성, 서산성은 고을 안에서 근거리 경계 진지이다. 옥천은 작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을이기에 관산성에 부속된 성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을 것이다. 지금은 삼양리토성 가는 길에 이정표도 없고 성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삼양리 오른쪽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갔다. 비얄밭을 지나니 토성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어떤 목적인지 철조망을 설치해 놓아서 함부로 넘을 수도 없다. 성벽으로 보이는 둔덕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겨우 몇 걸음 옮겼다. 잡목이 우거지고 낙엽에 덮여 길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다.

올라갔던 길을 되짚어 마을로 내려왔다. 어떤 역할을 했던 마을이었기에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삼양리토성이 남쪽에서 동으로 돌아가다가 경부고속도로에 의해 끊어졌다. 그 산줄기 가운데 제법 풍족해 보이는 마을이 있다. 산의 초입은 온통 검은 돌덩이가 널브러져 있다. 돌덩이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거미줄이 얼굴에 마구 휘감는다. 역사의 거미줄은 누구를 얽어 구속해 왔을까? 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둔덕이 있다. 주변에 성곽 같은 돌무더기가 있어 기록에는 토성으로 나와 있지만 토석혼축으로 보인다. 여기저기 돌무더기는 자연석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람 손길이 닿은 느낌도 든다. 하긴 사람의 손길조차도 세월이 지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토성도 이미 성벽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잡목이 우거지고 오솔길이 생겼으니 천오백년 세월은 사람의 일까지 모두 자연으로 되돌리는 마력을 지녔나 보다.

마루에 오르니 마을이 다 내려다 보였다. 마을의 앞에 대전으로 향하는 구도로가 있고 삼거리에서 서쪽 부여로 향하는 성왕로가 있다. 동으로는 보은, 남으로 김천으로 향하는 도로가 있으니 명실상부 사거리이다. 그러데 이곳은 삼거리로 불린다. 삼거리를 건너 관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모습이 뚜렷하다.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만나는 서산성과 함께 신라에서 올라오는 군사를 겹겹이 막고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관산성에서는 마전산성이 있는 추부 쪽으로 공격하는 군사를 방어하고, 서산성과 함께 북쪽 즉 문의나 회인 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방어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삼양리토성은 둘레가 500m쯤 된다. 보기에 작은 성이지만 당시에 이만한 토목 공사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인력을 동원했는지 짐작이 간다. 흙을 모아 등짐으로 져다가 널빤지를 대고 흙을 다져가면서 둔덕을 쌓으려면 지역의 백성이 몇 해를 두고 동원됐을 것이다. 옥토를 그냥 묵히고 겨울에는 앉아 굶어야 했을 서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봄이 되어 풀뿌리를 캐고 송기를 벗겨 연명하다가 또 공사장으로 끌려 나갔을 것이다. 권력의 횡포가 오늘에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역사는 그런 권력을 응징하고 있을까. 내 것으로 만들려는 억지나 죽어도 나누지 않겠다는 마음의 성벽이 성을 짓는다. 과거 옥천은 탐욕스런 권력자들의 싸움터가 됐고 백성들은 탐욕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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