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쌍삼층석탑에서 왼쪽 산줄기를 타면 장령산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오늘은 용암사로 만족한다.

우선 마애불을 보아야 한다. 마애불은 창건 당시의 작품이 아니라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작품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신라가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면서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을 기리기 위해서 마애불 불사를 했는지도 모른다. 사찰에서는 지금까지도 마의태자상이라 믿고 있는 것 같다.

마의태자는 덕주공주와 함께 하늘재를 넘어 월악산 아래 덕주사에서 머물렀다는 전설도 있으니 둘 중 하나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진실이라면 덕주사에 있는 마애불은 마의태자일까 덕주공주일까?

마애불은 연좌를 작은 발로 디디고 서 있다. 얼굴은 작고 귀가 아주 크다. 작은 눈, 다문 입술, 미소는 없다.

대부분의 마애불이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것과 달리 미소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의태자의 슬픔이라 이야기할 만도 하다. 불상이 내비치는 미소는 무엇을 의미할까? 때로는 깨달음에서 오는 법열의 미소일 수도 있고, 중생을 향한 자비의 미소일 수도 있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은 가장 인간적인 미소라 하기도 한다. 아무튼 대개의 불상은 미소를 띠고 있으나 용암사 마애불 입상은 미소가 없다. 대개 머리 부분에 각종 보주로 장식하지만 장식도 없다. 그냥 늘어진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다.

그런데 몸 전체로 보아 아랫부분은 바위 빛이 붉다. 붉은 빛깔이 불상을 자연적으로 화려하게 보이도록 자연 채색이 되었다. 마애불 전체가 구름 위에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 위에는 석모도 보문사 눈썹바위처럼 바위 갓이 있어 마애불 입상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어 신기하다. 마애불 앞에는 누가 밝혀 놓았는지 아직도 촛불이 켜져 있다. 마애불은 중생의 간구를 바라보는지 마는지 멀리 동쪽만 응시하고 있다.

산신각을 그냥 지나 천불전으로 내려왔다. 천불전은 들어가지 않고 벽화만 보았다. 마침 부처님의 열반 모습의 그림이 있어 한참을 쳐다보았다. 오열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비해 부처님의 모습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죽음은 그렇게 남은 사람의 슬픔에 비해 가는 사람은 편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발원의 깊이만큼 합장의 간절함도 깊어질 것이다. 소망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발원의 씨앗이다.

용암사는 장령산의 끝자락에 있다. 장령산 끝자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대웅전은 무슨 의미일까? 장령산은 옥천읍 한가운데 삼성산으로부터 용봉, 마대산을 거쳐 옥천을 포대기로 싸서 안고 있는 형상이다.

과거에는 신라와 백제 사이의 국경과 같은 산줄기였을 것이다. 장령산 끝자락에서 아스라한 동녘을 바라보는 대웅전은 신라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최후를 맞음으로 삼한일통의 경쟁은 진흥왕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신라는 옥천의 너른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성왕이라는 성군을 잃고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 그런 안타까움을 담아서 옥천 사람들이 장용산이었던 산을 장령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을 잘 보이지 않는 옥천 사람들이 백제에 더 많은 정을 가졌는지 신라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는 ‘글쎄유-’이다. 산을 내려오노라니 장령산 긴 산 그늘이 벌써 길을 가렸다. 삼청리 사람들은 마의태자의 흐느낌이 들리는지 마는지 마을은 고요하고 저수지에 비친 노을은 곱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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