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마을을 떠났으니 도망을 친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도무지 견딜 수 없어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화적으로 내몬 장본인들은 관아 관리들, 부자양반들, 지주들이었다. 그러니 그들 또한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있을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그래서 형님은 어떻게 죽령을 넘어왔소?”

“고개 재말랭이 주막에서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지.”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모으려고 이틀씩이나 주막에서 늑장을 부렸단 말이오? 무슨 딴 짓을 하셨겠지.”

최풍원은 아직도 천용백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죽령고개가 아무리 험하다 해도 죽령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나라의 큰길이었다.

“그쪽 사정을 모르니 뭔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인가. 요새는 사정이 확 달라졌어. 이전에는 대여섯 명만 모여 고개를 넘어와도 도둑들이 얼씬도 못했지만 사정이 달러. 도둑이 떼로 몰려다녀! 게다가 칼도 들고 있어! 그러니 행인들이나 장사꾼들은 수십 명은 모여야 출발을 해. 그래도 모두들 맘을 졸이며 고개를 넘어왔어!”

“그렇게 도둑들이 극성을 부린단 말이우?”

“동생은 그리 귀가 어두워 뭔 장사를 하겠는가! 장사꾼은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밝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 물건만 팔아먹으면 그만이란 놈도 빠꼼이 장사꾼이지만, 다른 동네 사정 모르는 놈도 빠꼼이 장사꾼밖에 될 수 없네!”

“그럼, 형님은 내가 빠꼼이란 말이우?”

“빠꼼이가 별건가? 지들 동네 일만 알면서 남의 동네일까지 그럴 거란 생각으로 살면 그게 빠꼼이지. 동생은 죽령 큰 재를 넘어 영남에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가?”

“죽령 재는 안 가봤어도 새재 밑에서 경상도 장사꾼들은 많이 봤지요.”

최풍원은 아주 오래전 마골산 수리봉에 살았던 시절과 윤 객주 상전에서 장사를 배우기 위해 연풍 일대를 떠돌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남의 입을 통해 듣는 얘기와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하고는 천지차이지. 영남도 한 번 가보게. 재 하나 사이지만 이쪽과 그쪽 산물들은 전혀 다른 것들이 많지.”

“알았슈. 그래 형님은 뭔 물건들을 가지고 왔소?”

“피륙장사가 피륙을 가지고 오지 뭘 가지고 왔겠는가?”

천용백이 지고 온 봇짐을 풀어놓았다. 봇짐에는 삼베와 모시, 그리고 명주가 켜켜이 들어있었다. 천용백이가 피륙들을 꺼내며 자랑이 늘어졌다.

“이건 안동폰데, 안동포 올 좀 봐! 올이 얼마나 고워. 이렇게 촘촘해도 여름엔 나가는 바람이 잘 통해 시원하고, 겨울엔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 얼마나 따뜻한 지 몰러. 이 모시 때깔은 또 어떻고, 얼마나 희고 가벼운 지 잠자리 날개 같잖어. 또 이 명주는 말이 필요 없어! 얼마나 매끄럽고 보드라운지 젖먹이 볼기짝도 이만은 못 혀!”

“아무리 좋으면 뭣해요? 언감생신 백성들에겐 꿈에 먹은 떡이지,”

“비싼 놈은 비싼 대로, 싼 놈은 싼 대로 물건엔 다 임자가 있는 법이여. 그래서 이런 강포가 있는 것이여.”

천용백이 봇짐 밑바닥에서 뚝눈에도 성글어 보이는 삼베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강포는 듣는 이 처음이오.”

최풍원은 천용백이 내놓은 강포를 처음 대하는지라 생소해서 되물었다.

“사람이 먹고 입는 게 가장 중한 일인데, 장사꾼이 사람 입는 베 이름도 모르니 참으로 딱하구려!”

천용백이 최풍원의 무지함을 꼬집었다.

“성님은 아무리 장사꾼이라고 해도 조선 팔도에서 나는 물산들을 어찌 다 알 수 있단 말이우?”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이 입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게 벤데, 그걸 모른다면 되겠는가. 더구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구해다 파는 장사꾼이. 그동안 뭔 장사를 하러 다녔단 말인가?”

“너무 핀잔만 주지 말고 알려주기나 하시오!”

“이건 태백산 너머 강원도 바닷가 영동지방에서 나오는 베여. 그런데 베가 곱지 않아 고급지지는 않지만 값이 싸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아주 인기가 좋지. 게다가 그쪽 바닷가는 바다와 산간지방이라 농토가 없어 고기를 잡는 어업이 주업이라 배를 탈 수 없는 부녀자들은 길쌈에만 매달리지.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베가 생산되고 값도 싸니 영동은 물론 우리 영남까지도 강포는 사람들에게 아주 긴한 피륙이구먼. 값도 내륙에서 생산되는 베에 비해 배는 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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