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발자취를 찾아]-단양 온달산성·충주 중원고구려비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한반도 역사를 왜곡, 중국의 변방사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던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 일대와 충주 한반도 유일의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인들의 웅혼한 정신이 우리의 피와 우리의 땅에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일대 조상들의 발자취를 개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국내 고구려의 옛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도시들이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고구려의 웅혼한 역사를 잃고 있다. 충청매일는 온달산성과 중원고구려비를 창간 5주년 특집으로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

 

▷온달산성

단양군 영춘면 하리와 백자리 사이 고구려 맹장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사적 264호 온달산성과 천연기념물인 261호 온달동굴 등이 있다.

단양 온달산성(해발 385∼554m)은 성곽의 바깥벽 둘레 682m(내벽 532m), 평균 높이 3m 가량의 작은 산성이지만 남한강 줄기가 성곽을 감싸안고 흐르며 사계가 한눈에 들어와 성곽위치로는 작전상 최고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 평온왕 사위 온달이 신라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동, 남, 북 세 개의 문이 보존돼 있으며 성곽주변에는 깨진 기와조각, 숫돌, 화살촉 등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또 온달장군 묘로 추정되는 대규모 ‘태장이 묘’가 발견돼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리 작은 지류가 흐르는 좁은 골짜기 산사면, 강원도 영월방면 575번 지방도로변에는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다.

남북 22m, 동서 10m, 높이 8.3m의 대규모이며 ‘태장이 묘’로 일컬어지는 이 돌무더기는 북서쪽 모서리가 허물어진 사다리꼴 형태이다. 돌무더기 양은 10t트럭 150대 분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 규모가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다.

한양대박물관(과장 배기동)은 이곳을 지난 19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발굴작업을 실시했으며 이 지역이 고구려 지배영역이었다는 점에서 고구려계 적석총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박물관 관계자들은 이 적석총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온달장군일 것이라는 데 주목해 왔다. 그러나 한양대 박물관 측과 단양군은 이곳이 온달장군의 묘라는 정확한 규명을 하지 못한 채 민간신앙유적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단양군은 지난 85년부터 온달동굴과 온달산성 복원공사, 태장이 묘 발굴공사를 연차적으로 실시하는 등 도내에서 유일한 고구려역사의 문화재 복원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군은 영춘면 하리 온달관광지 맞은편 제내지 약 7만평에 고구려 민속촌 건립계획을 세우고 올해 1차로 환경성 검토 용역을 추진 중에 있다.

이 곳에 고구려 민속촌이 건립되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고구려문화를 재현하고 교육을 위한 장소와 고구려문화권의 전국제일의 중심지로 고구려역사와 현대가 함께 공유하는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고취할 수 있는 역사의 장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원고구려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는 한반도 유일의 대표적인 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국보 205호)’가 있다.

한국고대사 규명에 금자탑을 이룰 수 있는 획기적인 금석문으로 충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지난 1979년 예성동우회에 의해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장수왕 69년(481)설과 문자왕 5년(496)설, 문자왕 15년(506) 이후 설 등으로 비문연구의 기초가 되는 건립 연대마저 명쾌하게 규명하지 못한 실정이다.

중원고구려비의 비문 내용은 ‘신라와 형제같이 지내기 바란다’는 뜻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 비를 건립한 목적은 신라왕 등에 의복을 하사하는 등 친선을 도모하며 고구려와 대립관계에 있는 백제를 의식하고 후일 신라에 반 고구려 의식이 일 것을 우려해 이를 사전에 잠재우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5세기 무렵 고구려가 충주에 국가의 근원이 되는 곳이라는 의미로 국원성(國源城)을 설치하고 하임궁(河臨宮)이란 궁전까지 건설 한 것은 삼국간의 쟁패에서 충주가 가지는 전략적 가치를 인정, 중요시한 결과이다.

고구려 광개토왕 6년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광개토왕이 세력을 확대한 후 고구려는 충주를 장악한 뒤 신라왕을 매금(寐錦)으로 칭하는 등 충주지역을 삼국통합을 위한 남방경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그 사실은 충주를 장악한 뒤 부도의 성격을 갖는 국원성으로 삼은 점과 가금면 용전리에 세운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으며 배산임수의 자연조건을 이용해 계단식 축성방식을 이용해 쌓은 장미산성 등에서 실감 할 수 있다.

장미산성 주변 일대인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에 위치한 마애불상 군과 노은면에서 출토된다는 건흥5년명(建興五年銘) 금동불입상(金銅佛入像), 중앙탑(중원 탑평리 7층 석탑)이 위치한 부근에서 수습된 고구려연화문 수막새기와 장미산성과 자매산성으로 간주되는 노은면 연하리 보련산성(천룔산성), 가금면 하구암리와 누암리 고문에서 확인된 고구려식 방형석실분 등은 고구려 장인의 유품이거나 그들의 영향에 의해 남겨진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고구려문화와 역사에 대해 너무 소홀했다.

지역을 찾은 관광객들에게도 역사적 이미지와 매력을 심어주지 못해 훌륭한 고구려 문화유산을 옆에 두고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고구려역사를 활용한 우리만의 이미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독특한 고구려문화의 이미지를 복원하고 재창출할 수 있는 집중화 전략이 필수적이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사실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증명하는 증거다.

그래서 더욱 더 관리하고 보존하고 발굴해야 한다.

역사를 지켜내는 일은 오늘과 내일의 우리를 지키는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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