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얼마 전 삼성산성에서 시작해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을 한꺼번에 답사하고 힘겹게 내려와 장령산 그림자가 내리는 삼청리 저수지에서 용암사 쪽만 바라보다가 경찰 순찰차를 얻어 타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용암사를 마음에 걸어 놓고 살았다.

소한인데도 추위가 약간 누그러졌다. 이날 아침 옥천 장령산용암사를 생각해냈다. 장령산은 오르지 못하더라도 용암사만은 다녀오리라. 빵 한 덩어리를 차에 싣고 내비에 용암사를 치고 출발한다. 삼청리 저수지를 지나 산문에 이르니 겨울 가뭄 속에서도 길가에 눈이 남아 있다. 움푹 패어난 곳에는 눈이 얼었다. 가풀막진 길은 올라갈수록 눈이 얼어붙었다. 오를수록 절경이다. 저 앞에 성벽 같은 축대가 떡 막아서는가했더니 거기가 용암사이다. 대숲 우거진 곳에 주차장이 있다. 물이 흥건하다. 극심한 겨울 가뭄 속에서도 여기는 샘물이 용솟음친다. 축대 밑에서 맑은 물이 솟아오른다. 절집에서 나오는 물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내려 보내는 자비처럼 맑고 깨끗하다. 사찰은 아주 고요하다. 승방은 자물쇠가 걸려 있다. 성벽 같은 축대 사이로 돌층계를 올라서니 앞에 대웅전이 웅장하다. 단청이 화려해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이지 않았다.

용암사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번성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서 명맥만 유지해 왔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 쌍삼층석탑과 마애불 덕분에 그나마 명맥이 유지됐을 것이다. 대웅전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단청이 화려하고 웅장해 보였다.

법당 문을 조용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님도 신도도 없다. 불상도 거룩하고 배면 탱화도 아름답다. 법당에 아무도 보는 이가 없어 사진을 찍고 싶은 유혹에 마음 졸였다. 그러나 천지(天知), 지지(地知), 아지(我知), 자지(子知)란 말이 있다. 세상에 아무리 비밀이라 해도 감출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해도 부처님은 보고 있지 않은가. 본존불 배면 탱화는 괘불이 아니라 목각 부조 위에 금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가방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고 카메라도 내려놓고 아주 조용히 삼배를 올렸다.

임진년 난리를 맞아 불에 타 사라지는 부처님을 상상하니 마음이 뻐근했다. 용암사가 겪은 왜란은 한 번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절 안에 있는 용바위를 깨부쉈다고 한다. 속속들이 계획적이고 목적이 악랄하고 치졸한 일인들로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절을 불태우고 용암을 깨부수고도 남겨 둔 것은 쌍삼층석탑이다. 석탑의 고귀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석탑의 울력과 앙화가 두려웠을 것이다. 야만인들에게도 옅은 신앙심이라도 남아있었던지 더러운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

용암을 깨부수고 절을 불태운 목적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훼손하는 것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 이후에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 좌절감을 심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용바위가 마을과 민족의 안위를 지켜줄 것이라는 절 아래 양민들의 믿음을 깨어버리고 좌절감에 빠뜨리려는 악랄한 행위 말이다. 우리 민족 전체를 무기력한 패배주의자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속셈 말이다. 전국의 명산의 마루마다 박아 놓은 철심이 그렇고 고을마다 사직을 땅에 묻어버린 행위가 그렇다. 언젠가는 신의 노여움이 그들에게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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