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어험이 작성되면 가운데를 잘라 채무자의 이름이 있는 남표를 채권자에게 반대쪽인 여표는 채무자가 보관하였다가,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지불 요구하면 채무자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여표와 맞추어보고 적혀있는 액면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험을 절단하지 않고 통째 채권자에게 교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였다.

“그렇다면 김 객주는 그 어험이라는 것을 써주고 쌀을 빌려가자는 말이우?”

단리 복석근 임방주가 물었다.

“그렇소.”

“쌀이 쉰 석인데 그깟 종이쪽지로 될까?”

복석근이 미심쩍어했다.

“되고 안 되고는 나중 문제고, 그것도 빚을 지는 것인데 누가 책임을 질 거요?”

장순갑이가 책임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를 물었다.

“본방에서 하는 일이니 모든 임방주들이 함께 책임을 져야지 누가 진다는 말이오?”

복석근이 당연한 것을 뭣하러 묻느냐는 식으로 장순갑에게 되물었다.

“왜 그걸 모든 임방주들이 책임을 져야한단 말이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우리 공동의 일인데 모두가 책임지는 게 당연한 일 아니오?”

“모든 임방에서 임방주 모두가 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북진임방 장순갑의 속셈은 분명했다. 장순갑의 말처럼 북진본방 회합 때 처음부터 반대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임방주들이 찬동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은근슬쩍 꼬리를 내렸었다. 그리고 오늘 박왕발이의 기별을 받고 충주로 득달같이 달려온 것도 최풍원과 윤왕구 객주 사이에 거래가 성사되어 쌀을 가져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잔뜩 품고서였다. 그런데 당도해보니 쌀은커녕 도리어 잘못했다가는 빚만 질 것 같으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어떻게 하든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최풍원도 북진임방 장순갑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양평과 북진 임방주님은 그만 두시오. 그리고 어험은 다음 문제고, 일단 내게도 생각이 있소이다. 윤 객주님을 모시고 나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오!”

최풍원이 왈가왈부하는 임방주들을 진정시키고는 윤왕구 객주를 데리고 나오겠다며 상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보시오, 북진 임방주는 어째서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거요?”

연론 박한달이 장순갑 임방주를 질책했다.

“제 욕심만 차리려고 하니 그런 게지!”

양평 김상만이 장순갑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려면 지 혼자 행상이나 하지 본방에는 왜 들어왔디야?”

광의 김길성도 장순갑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행상할 주제나 되는가? 근근이 땅이나 파며 탁주잔이나 팔다가 최 대주 만나 살만해졌으면 은혜를 알아야지. 좀 먹고 살만해졌다고 옛날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거정을 피우니 눈꼴이 사나워서.”

장순갑과는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장석이도 형님뻘인 장순갑을 대우하지 않고 그의 행태를 비난했다.

“왜 다들 나한테만 지랄들이여!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한다는데 니들이 뭔 참견이여?”

장순갑이가 핏대를 올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게 니 돈이냐, 장사가 니 혼자 하는 것이냐, 마을 사람들이 니 물건을 팔아주지 않았으면 지금 니가 그 재산을 만들 수 있었겠냐? 니가 어려울 때 마을 사람들이 도와줘서 그만큼 살게 되었으면, 너도 그 사람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이 사람새끼지 공을 모르면 그게 짐승새끼지 사람 새끼냐? 사람이 심보를 곱게 써야 하늘에서도 복을 내리는 법이여!”

“인심을 잃으면 천심을 잃는 것이여!”

박한달의 악담에 사람 좋은 김길성까지 거들며 나섰다.

밖에서는 북진본방 임방주들이 장순갑을 몰아세우고 있는 그 시간에 안에서는 최풍원이 윤왕구 객주를 만나고 있었다.

“객주 어른, 신표를 보여드릴 테니 밖으로 잠시 밖으로 나가시지요?”

최풍원이 윤왕구 객주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무슨 신표가 밖에 있단 말인가?”

“나가보시면 아실 터이니 우선 나가보시지요!”

최풍원이 재차 권했다.

최풍원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윤왕구 객주가 밖으로 따라나섰다. 사랑채가 있는 바깥으로 나오자 거기에는 이십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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