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고려시대 ‘직지’가 금속활자로 간행된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국가에서 인쇄기관을 설치하고 많은 책들을 출판해 학문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음에도 모든 대중들이 문맹을 깨우치지 못해 문화소통에는 저해요인이 됐다.
서양의 활자인쇄 선구자였던 독일에서는 ‘42행 성서’ 간행 이후에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판매용 성서를 발간해 보급시키는 등 책을 통한 문화 전파에 훨씬 실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어 많은 대중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교회의 부조리가 발견되고, 1517년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일부 귀족에 대한 항거이기도 한 개혁이 과학혁명으로 이어져 18세기에는 전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원동력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산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상인층들은 교육으로 눈을 돌려 결국은 문맹퇴치에 앞섰으며, 이를 계기로 대학이 생겨나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에 의해 민주정치가 실현됐다. 이처럼 서양의 문명사적 관점에서는 구텐베르크의 영향력이 참으로 컸다.   
동·서양 최초로 간행된 책들은 당시의 사회구조가 종교 중심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종교서적들이 최우선적으로 간행됐다. 우리나라는 불교, 독일은 카톨릭이 국교로 종교가 지배하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인쇄문화는 목판본에서도 불교관련 서적이 주종을 이루었다. 고려말기에도 ‘직지’보다 같은 시기로 추정되는 ‘자비도량참법집해’ 또한 금속활자본으로 찍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인쇄술은 종교서적에만 국한되지 않고 학생들의 교재를 출판하는 등 실용적이었음이 기록에 나타난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뒤 가장 먼저 발간한 책은 기원전 350년에 로마의 문법학자인 도나투스(Aelius Donatus)가 저술한 ‘라틴어 문법(Ars Maior)’ 책이다. 이 책은 본래 아동용 문법교과서인데 당시 유럽의 모든 대학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시중에서 널리 쓰이는 언어가 아니라 오직 라틴어로만 강의를 했기 때문에 모든 아동에서 대학생까지 정말로 필요했던 교재였다.
현존하는 ‘직지’의 경우 목판본에 비해 항렬(行列)과 활자가 고르지 않거나 거꾸로 뒤집히거나 일부에 목활자로 상감(象嵌)하는 등 조판기술 미흡한 점이 발견된다. 활자본에 있어 이러한 오류는 완성본 이전에 최종 교정쇄본일 수도 있다. 만일 현재의 ‘직지’가 교정본이라면 또 다른 완성본이 있을 수 있다. 금속활자본은 목판본과 달라 활자를 다 찍어내면 조판을 해체하기 때문에 그 조판본이나 활자를 찾기는 어렵지만 또 다른 인쇄된 책이 발견될 가능성은 충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직지’ 원본을 소장한다면 2018년도에 프랑스에서 ‘직지’ 대여전시를 조건으로 내세운 위해 한시적 압류면제법(押留免除法) 같은 굴욕적 협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21세기는 세계로 확대되는 글로벌 시대의 무대 위에 서야 한다. 민족주의나 단체 이기주의에 빠지거나 정치적인 요인에 물들지 말고 ‘직지’의 창조 정신을 되살려 잠재된 기술문화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직지’가 인류문명에 이바지한 공(功)을 계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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