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범 노 스님이 윤왕구 객주의 안부를 물었다.
“그렇잖아도 스님을 뵈면 안부를 여쭈라고 하셨습니다.”
“산중에 처박혀 하릴없이 밥이나 축내는 늙은 것한테 안부는 무슨!”
“스님, 절도 썰렁합니다요?”
“세상이 썰렁한데 절간만 북적거려도 이상하지 않은가. 속세에 부처님들이 편해야 산중에 부처도 찾아올 텐데, 세상이 저리 힘겨우니 법당 부처를 찾을 겨를이 있겠는가?”
“스님은 산중에 계셔도, 세상을 다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늙은 중놈이 헛소리를 한 게지, 보이긴 뭐가 보이는가. 처사님들 차나 드시게!”
원범 노 스님이 다기를 들어 세 사람 앞에 놓인 잔에 차를 찬찬히 따랐다.
“연잎차가 좋습니다.”
우갑 노인이 스님에게 말했다.
“지난 해 연한 이파리만 따서 만들었는데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처사님들이 마지막 차 손님이구랴. 이 젊은 처사들은 누구신가?”
원범 노 스님이 찻잔에 다시 차를 채우며 물었다.
“아이고, 스님께 인사부터 여쭙게 한다는 걸 깜빡 했습니다요. 어서들 인사 여쭙게.창룡사 방장스님이시네.”
우갑 노인이 두 사람에게 일렀다.
“최풍원이옵니다.”
“장석이구먼유.”
두 사람이 일어나 절을 하려고 하자, 노 스님이 손사래를 치며 주저앉혔다.
“으흠, 두 사람 눈빛이 참으로 선하구먼.”
한참동안 두 사람 인상을 살피더니 노 스님이 덕담을 했다.
“장사하는 우갑 아범과 왔으니 장사하는 사람들일 터이고, 어디에서들 오셨는가?”
“청풍 북진에서 왔고, 이 형과 저는 함께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최풍원이 자신과 장석이를 함께 소개했다.
“스님, 이 젊은이 관상 좀 보시지요?”
우갑 노인이 최풍원을 지목하며 노 스님에게 청했다.
“늙다리 중놈이 앞길 창창한 젊은이 관상을 어찌 볼 수 있겠누.”
“사양하지 마시고 어리석은 중생에게 힘 좀 주시지요?”
우갑 노인이 재차 청을 넣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깨치는 공부를 했어도, 제 앞길 하나 어찌될지 모르는 멍충이에게 뭘 자꾸 그러누. 그냥 차나 드시게!”
원범 노 스님이 극구 사양했다.
“스님의 원력이 꼭 필요한 젊은이옵니다. 은혜를 한 번 베풀어주십시오!”
우갑 노인이 삼청을 넣었다.
“우갑 아범도 나이가 들더니 쇠심줄만 남았구먼. 어째 그리도 질기누?”
“스님, 송구스럽습니다!”
“지 일은 지가 제일 잘 아는 것을 누구에게 물어본다는 말인가. 하루하루 사는 것도 버거운 판에 오지도 않은 앞날은 뭣 때문에 미리 잡아땡겨 사서 걱정을 한다냐. 어리석은 짓거리들이지. 쯧쯧쯔!”
원범 노스님이 못마땅해서 혀를 찼다.
“스님, 평생을 무명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가는 중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가엾게 여겨 한 번만 봐주세요!”
“어허, 그것참! 최풍원 처사라 그러셨던가?”
우갑 노인의 끈질김에 더 이상 거절을 못하고 노 스님이 최풍원에게 물었다.
“네, 스님.”
“절밥 먹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원범 노 스님이 느닷없이 최풍원에게 절밥을 먹자고 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최풍원이 노 스님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해 되물었다.
“중질 할 생각 없느냐 이 말이여!”
“네에?”
생각지도 못했던 노 스님의 말에 최풍원은 잠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 저 친구처럼 부모형제가 있으면 세상 인연을 끊기 어렵겠지만, 자네는 세상천지에 홀홀단신이니 자네 맘먹기 나름 아니겠는가?”
원범 노 스님이 장석이와 최풍원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살펴보더니 하는 말이었다.
“…….”
최풍원이 대답 대신 노 스님을 빤하게 쳐다보았다. 한동안 멍해있던 최풍원의 머릿속이 일순간 명료해졌다. 뭔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노 스님이 자신의 말처럼 절간에 들어앉아 밥이나 축내는 늙은 중에 불과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노 스님에 대한 신비감도 두려움도 없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