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걷다 보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띈다. 청주시청에서 도청을 지나 향교로 접어든다. 오른쪽 가파른 길을 오르고 탑동 좁은 골목을 걸었다.

언제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됐을까. 가파른 언덕과 좁은 골목 허물어가는 집이 눈에 많이 띄었다. 빈집, 저 집에서 일가를 이루고 누군가는 평생의 삶이 깃들어 있을 장소였을 것이다. 무슨 연유로 집 혼자서 지나온 세월을 견디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대성동과 탑동은 청주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마을로 도시의 성장과 함께 쇠퇴해가는 곳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청주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하루 여섯 번 들어오는 시골 버스는 도회지로 떠난 자식들을 태우고 주말이면 분주했다. 나도 덩달아 설레고 신이 났다. 나를 제외한 형과 누나들 역시 도시로 떠났다. 중학교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고향. 그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막차를 타고 산모퉁이를 돌아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이 사라질 때부터 마을은 빈집이 되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는 처음 경험하는 도시의 삶에 대한 기대감과 다들 그랬듯이 으레 고향을 떠나는 대견한 모습 앞에 남겨진 부모들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 왔을 뿐.

어느덧 옛것이 좋아지고 그리운 나이가 됐다. 된장찌개, 칼국수, 보리밥이 생각난다. 겨울이면 지겹게 먹던 감자조림이나 개떡, 무말랭이, 깻잎도 생각나고, 뭐니 뭐니 해도 울 엄마가 끓여주던 고추장돼지찌개와 돼지껍데기 무침이 제일 그립다. 이제 도시사람이 다 됐다는 방증이리라.

그 세월동안 나도 어엿하게 일가를 이루었다. 몇몇 집을 옮겨가며 아파트도 장만하고(반은 은행 소유이지만) 아이도 낳고 살림도 꾸렸다. 그러면서 전에 없던 물건이 늘고 통지서가 늘고 비었던 공간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주 열심히는 아니어도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주했다. 분주한 만큼 알 수 없는 공허함은 커져갔고 길 잃은 승냥이처럼 건밤의 날을 보내기도 했다.

나의 집이 채워지는 동안 엄마의 빈집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 현관을 열고 컴컴한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날 많아질수록 그제야 엄마의 빈집을 생각한다. 그런 게 자식이라고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은 유년의 고향도 엄마의 집도 사라진 후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곧 설이 다가온다. 장성한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고향을 찾을 것이다. 전쟁같이 하루를 보내고 또 훌쩍 떠날 것이다. 이제 머무름보다 떠남이 익숙한 세상이다. 서운하지만, 티내는 법 없는 집에 가야겠다. 아직은 빈집이 아니라고 벽에 걸린 색 바랜 사진처럼 활짝 웃어야겠다. 언젠가 나의 집도 비워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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