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말씀은 항시 명심하고 있습니다.”

“어르신을 설득할 무슨 방책은 준비해 두었느냐?”

“새벽녘에 왕발이를 청풍으로 보냈습니다.”

“청풍에는 왜?”

“오늘 저녁이 되면 객주 어른의 뜻을 알 수 있겠지요.”

우갑 노인의 물음에 최풍원은 저녁때까지 기다려보자고 말했다.

“그럼 하루를 예서 더 묵어야겠구나. 오늘 낮에는 무얼 할테냐?”

“충주 장구경이나 하렵니다.”

“장구경한다고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겠느냐? 나하고 남산절에나 다녀오자.”

“절에는 어째요?”

“초하루가 며칠 뒤니 절집에서 재 올리는데 필요한 물품과 공양미를 갖다 줘야 한다. 간 길에 원범 노스님도 뵙고 덕담도 들어보자꾸나.”

우갑 노인이 최풍원에게 동행을 권했다.

남산은 충주의 진산으로 관아를 중심으로 동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금봉산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남산 꼭대기에는 남산성이 있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고려 때 몽고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충주 사람들은 이를 큰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다.

우갑 노인, 최풍원, 장석이 세 사람은 나귀에 짐을 싣고 충주천을 따라 남산 창룡사를 향해 걸었다. 개천 빨래터마다 아낙들이 겨우내 밀렸던 옷가지들을 가지고 나와 물가 자갈밭마다 눈이 내린 것처럼 희었다.

“이 일대를 에전에는 사천개라고 했는데, 이 범바위에서 나온 이름이여.”

우갑 노인이 소나무 숲이 울창한 창룡사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우갑 노인이 가리키는 길가 왼편을 보니 흡사 호랑이 같은 형상의 바위가 우뚝 서있었다. 우갑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 사람들은 범처럼 생긴 이 바위가 자신들과 마을을 지켜주는 파수대라 하여 산신령으로 섬겨왔으며, 그런 이유로 지금은 호암으로 불린다고 했다.

“호랭이처럼 보이긴 허네유.”

장석이가 범바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범바위를 돌아 송림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하늘이 터지며 여러 채의 절집이 눈앞에 보였다. 세 사람은 나귀를 절집 밖에 매어놓고 경내로 들어섰다.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창룡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에 의해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충주를 지나던 중 날이 저물어 어떤 객주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속에서 여의주를 물고 놀고 있는 푸른 용을 따라 정처 없이 가다보니 매우 목이 말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원효대사 눈앞에 아름다운 처녀가 나타나 표주박에 물을 떠주며, “이곳이 참 좋지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 물맛이 꿀맛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이 현몽한 것임을 알고 꿈속에서 보았던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지금의 창룡사 절터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꿈에서 본 곳과 같은 장소임을 알고 불사를 한 후 아미타불을 모시고 푸른 용의 이름을 따 창룡사라 했다. 

“처사님들 어서들 오시오!”

나귀의 방울 소리를 들었는지 노 스님이 미리 나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범 스님, 그동안 무고하셨는지요?”

“나 같은 늙은 중놈에게 일어날 일이 뭐가 있겠소이까.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하고 오시지요.”

원범 노 스님이 요사채 위의 극락보전을 가리키며 세 사람에게 그곳부터 다녀오라고 일렀다.

“부처님도 바쁘시니 여러 가지 빌지 말고 한 가지만 말씀들 해보시구려!”

극락보전으로 올라가는 세 사람의 등 뒤에다 대고 원범 스님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최풍원은 법당에 꿇어앉아 아미타불께 절을 하며 ‘제발 쌀을 얻어 북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사’하고 빌었다. 최풍원이 현재 겪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그것이었다. 그것만 해결되면 세상만사 모든 고민거리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차나 한 잔 나눕시다.”

원범 노 스님이 법당에서 내려온 세 사람에게 요사채로 들 것을 권했다.

“스님, 초하루에 쓸 재물과 공양미를 좀 가져왔습니다.”

우갑 노인이 스님에게 가지고 온 물목을 알렸다.

“늙은 중놈이 하는 일도 없이 절방에 들어앉아 부처님을 빙자해 중생들 양식이나 탐하고 있습니다 그려.”

“스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듣는 지들이 무참합니다!”

“윤 객주는 잘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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