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지난달 27일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TV를 틀었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밀양 세종병원 화재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제천스포츠센터 참사가 일어난지 한 달도 안되는데 또 80~90대 노인들이 요양병원 침상에 매여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며 유독 가스에 질식을 당한 참사가41명에 이르렀다. 노부모의 사랑을 잃은 자식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유족들의 통곡소리가 메마른 찬 겨울 하늘에 구슬프게 메아리친다. 화재에 대한 재발방지, 제도개선, 책임문제는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처지가 됐다.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믿고 싶지 않지만 날마다 쏟아지는 사고로 하늘 땅 바다 어디 한 곳도 안전한 곳이 없는 것 같은 생각에 불안하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자식들의 상실감! 애절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안전사고로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도 따듯한 위로의 정을 보내고 싶다.

대문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영하 18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아침 큰딸내외가 들어왔다. 오서방이 위암 수술을 받고 그 후유증 검진 예약이 있어 서울 아산병원을 가는 길이란다. 서울 작은 딸에게도 김치랑 과일 등 먹을 반찬 만든 것을 보내려 아내가 부른 것이다. 무엇이든 자식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어 하는 엄마의 따듯한 정(情)이었으리라.

아침을 먹고 나니 아들 며느리가 전화를 했다. ‘날씨가 추우니 방안에서 꼼짝하지 마세요.’ 보통 추위가 아니여서 부모의 안위가 걱정돼 온 전화였다. 얼마 후 카톡 카톡 스마트 폰이 요란하다. 이국 만리 타국 땅 마레이지아 국제학교에서 공부하는 큰손자의 전화다. “할머니 할아버지 추위에 어떻게 지내세요. 보고 싶어요.” 6개월 전 늦은 여름에 다녀간 손자의 전화를 받아든 아내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가족이 서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따뜻한 정이 어디 나만일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혈육의 끈끈한 사랑과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 이러한 귀중한 정을 한 순간에 덮친 안전사고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귀한 생명을 잃은 사람도 안타깝지만 가족을 잃은 수많은 유족들은 가슴에 한 평생을 두고 슬픈 상처와 한이 맺혀있으리라.

우리나라 가족사랑 정은 오랜 세월 뿌리깊이 내려오는 한국적 자랑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이다. 그것이 가족간 혈육의 정이 아닌가.

혈육의 정! 꽃이 피어날 때 짙은 향을 토해내듯, 소리없이 연못에 물이 차오르듯 우리들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정(情)! 그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맹자(孟子)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부여된 본성의 하나인 측은지심(惻隱地心)이 정이라 했다. 초 고령화 사회에 홀로 사는 고독한 노인이 늘어만 가는 세상이다. 날마다 수없이 일어나는 교통사고, 추운 겨울철 화재사고 등 안전사고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 못살고 가난해 헌집에 살아도 가족이 화목하면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더 나아가 진정한 복지국가는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전사고 예방이 잘 되어있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아무리 국민 소득이 높아도 졸지에 화마가 귀중한 생명과 혈육의 정을 잃어 평생 슬픔의 한을 품고 살게 된다면 그것이 어찌 행복한 복지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안전사고 예방이 철저하고 꼼꼼히 지켜지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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