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주 어른, 저희 북진본방은 자리가 잡힐 때까지는 임방주들이 모든 이득금을 내놓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저도 내놓은 것입니다.”

“뜻들은 좋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것인가?”

“객주 어른 상전에서 가져간 물건 값을 다 갚을 때까지만 그리 할 것입니다요.”

“그럼 남아있는 백 냥은 어찌 할 것인가. 빚이 있으니 새로이 필요한 물건은 가져가지 않을 생각인가?”

“실은 그것 때문에 어제부터 객주어른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풍원이 윤 객주의 표정부터 살폈다.

“우갑 아범에게 얘기해도 될 일을 뭘 때문에 나를 기다렸는가?”

윤 객주가 우갑 노인을 쳐다보았다.

“어르신 제 단독으로 처리할 일이 아닌 듯하여…….”

우갑 노인이 말꼬리를 흐리며 최풍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최 대주가 얘기해 보게!”

“객주 어른, 쌀 쉰 석을 빌려주십사 부탁을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져가면 되지, 뭐가 문제란 말인가?”

“어르신, 그게 아니라 청풍 고을민들에게 풀어먹일 쌀을 달라는 것입니다.”

우갑 노인이 최풍원을 거들었다.

“북진본방에서 왜 청풍 고을민들에게 쌀을 푼다는 말인가?”

“객주 어른, 지금 청풍에서는 고을민들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춘궁기라 그러하기는 하지만 올해 유난히도 더 심한 것은 청풍도가에서 곡식이란 곡식은 보이는 즉시 싹싹 긁어가서는 내놓지를 않고 있습니다. 배곯는 고을민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려는 야비한 짓거리지요. 그래서 청풍도가에 대한 고을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이럴 때 북진본방에서 쌀을 푼다면 반대로 민심이 우리에게로 돌려지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리 하면 될 것 아닌가?”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어르신.”

우갑 노인이 다시 끼어들었다.

“뭐가 그렇지 않다는 겐가?”

“어르신, 쌀 쉰 석을 팔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무상으로 그냥 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쉰 석이나 되는 쌀을 청풍 고을민들에게 그냥 퍼주겠다는 말인가?”

윤 객주가 최풍원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 쫄쫄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양식 팔아먹을 돈인들 있겠습니까?”

“고을민들 사정이야 딱하지만, 그렇다고 북진본방에서 그들에게 양식을 퍼줄 정도로 여력이 있겠는가?”

윤 객주는 북진본방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사를 오랫동안 해서 기반이 탄탄한 것도 아니고, 이제 장사를 시작한 터라 북진본방도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은 뻔했다. 분진본방도 홀로서기가 힘든 지경에 남을 돕는다는 것이 제 주제 파악도 못하는 것 같아 윤 객주가 하는 말이었다.

“당장 받을 것이 없어서 그렇지 거저 퍼주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쌀값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말미를 주십사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 그 말미가 언제인가?”

“새싹이 나오는 봄만 돌아오면 무슨 수를 쓰든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쉰 석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최 대주는 내게 무엇을 주겠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거래가 말로만 되는 것인가. 내가 믿을 수 있도록 뭐라도 신표를 줘야 안심을 하고 물건을 내 줄 것 아닌가? 뭐를 주겠는가?”

윤 객주가 신표를 달라고 했다.

“…….”

최풍원은 당장 윤 객주에게 줄 그 무엇도 없었다.

“장사꾼이 그런 대책도 없이 무슨 거래를 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자네는 이제 예전 혼자 떠돌며 장사하던 행상이 아니라 무리들을 이끌고 장사를 하는 청풍지역의 대주일세. 그런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찾아와 막연한 대답만 한다면 거래가 이뤄지겠는가. 조직의 책임자가 되려면, 그리고 조직을 이끌려면 그 사람은 두세 가지 방책은 물론이고, 그 방책이 통하지 않았을 때 최후의 마지막 방책은 항시 마련하고 상대를 만나야 한다. 봄까지 내가 빌려주겠네. 그렇다면 내가 그때까지 믿고 내줄 수 있도록 나를 안심시킬 그 무엇을 보여주게!”

“…….”

윤 객주가 재차 재촉했지만 최풍원은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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