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어라? 왜 이렇게 길이 파헤쳐져 있지? 누가 여기에 나무를 심으려고 그랬나? 머리가 갸웃해졌다.

평소에도 좁아서 조심스러운 길이었다. 부엽토가 산길을 따라 마구잡이로 시꺼멓게 뒤집혀 있었다. 길이 더 좁아졌다. 골짜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멧돼지가 한 짓이여. 지나가던 등산객이 현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제 칼바위 초소 근처에서 멧돼지 지나가는 거 봤어. 뭐라구? 그래서 어쨌어? 가만히 숨죽이고 잔뜩 노려보았지. 어찌나 놀랬는지 하마터면 뛰어 달아날 뻔했어야. 순간 등을 보이고 뛰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이 확 떠오르는 거야. 그래 달겨들면 등산지팡이로 막으려고 힘껏 잡고 있었어. 나중엔 손이 다 부들부들 떨리더라고. 에고, 큰일 날 뻔했네. 나를 본 거는 같은데 그냥 고개를 돌리더니 저기 숲속으로 들어가 버리더라구. 아이고, 잘했구먼. 막 소리라도 지르지 그랬어? 아휴 말마, 소리가 다 뭐야. 입이 얼어붙은 거 마냥 떨어지지도 않았어.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몸에 진땀이 나서 혼났어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들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사실 나도 지난해 아파트 앞마당까지 겁 없이 내려온 멧돼지를 본 적이 있었다. 눈이 한 자나 쌓인 겨울밤이었다.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듯 요란한 소리에 놀라 내다보았다. 덩치가 산만 한 녀석이 음식물 수거통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각 초소 경비 아저씨들과 장정들이 몰려나와 냄비를 두드리며 녀석을 산으로 내몰았다. 위험을 무릎 쓴 처사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 서슬에 놀랐는지 녀석은 혼비백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왜 민가까지 내려왔을까? 그 녀석, 어쩌면 가장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눈길에 미끄러지며 감히 여기까지 내려올 엄두를 못 냈으리라. 그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아릿했다. 졸졸 무리 지어 다니는 멧돼지 새끼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 후 산행 때마다 문득문득 녀석의 실루엣이 떠오르곤 했다.

봐봐, 저기도 다 헤집어 놓았네. 여기는 아무것도 아니야. 농촌은 말도 못 한대. 잘 키워 놓은 농작물을 형편없이 망가뜨리고 몽땅 먹고 간다잖어.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 산에서 도토리랑 잣 좀 가져가지 말라고 했잖여. 되게들 말도 안 들어. 그렇게 싹쓸이해가니 마을로 내려와 내 먹이 내 놓아라 하는 거 아니냐구. 앞서가던 아저씨가 흥분한 듯 열변을 토했다. 가뜩이나 목소리 큰 사람이 또 왜 저래? 목소리만 크면 다야? 흥! 그러는 사람이 여기서 주운 도토리로 묵 쑤어 주니까, 야들야들하니 맛있다며 젤로 맛있게 잘만 먹더라. 역시 자연산이라 다르다나 뭐라나? 사방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일어났다.

때마침 잣숭어리가 내 발밑에 툭 떨어졌다. 무심결에 주워들었다. 앞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견물생심인지 잠시 집으로 가져갈까 말까 갈등하다 얼른 숲속으로 던져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후드득 내려온 청솔모가 냉큼 물더니 나무 위로 휙 사라졌다.

연전의 한 노인이 떠올랐다. 바스락바스락 소리에 둘러보니 산길 휴식년제를 위해 쳐놓은 출입금지 펜스 너머에서 나는 소리였다. 추리닝을 입은 노인이 지팡이로 바닥에 쌓인 낙엽을 헤집으며 잣숭어리와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며칠째 멀찍이서 지켜만 보던 나는 그날따라 문득 내가 비겁하게 느껴졌다. 속으로만 언짢아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려야 하지 않을까? 이러다 정말 산동물들이 다 굶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일자 나도 모르게 불쑥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 좀 주워 가세요. 이젠 그만 산에 사는 애들에게 양보하면 안 되나요? 녀석들 먹게 그냥 좀 남겨두세요! 갑작스런 고함에 놀랐는지 그가 허리를 펴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 운동하고 있는 거야, 내가 심심해서 운동하고 있는 거라고. 가던 길이나 그냥 가셔! 나를 향해 그는 지팡이를 마구 휘둘렀다. 어깨에 멘 배낭이 축 처진 게 이미 두둑해 보였다. 지켜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더 깊은 산속으로 사라졌다.

모처럼 낸 용기에 등짝이 화끈했다. 금세 허탈감이 밀려왔다. 오늘이 마지막일세. 이젠 정말 그만이야. 미안하네 하는 반응을 기대했던가? 어처구니없던 해프닝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왠지 뜻 모를 안쓰러움이 찾아들었다. 남루한 차림의 그 노인, 가족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불법채취를 했다면 얼마나 민망했을까. 불현듯 내가 믿고 있는 규칙이 누구에게나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도토리묵이나 잣을 보아도 언뜻 손이 가지 않았다.

심하게 파헤쳐진 흔적이 또 보였다. 길게 이어진 자취 끝 쪽에 사람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푯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경계를 이루는 목책도 세워져 있었다. 그 선을 녀석들은 의연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금 밖 우리네 길에는 푹신한 마포가 깔렸다.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는 계단이 놓였다. 질어서 신발이 빠지는 곳에는 돌이 깔렸다. 산허리를 도는 둘레길이 완성되었고, 임산부나 노약자가 쉽게 걸을 수 있는 자락길도 생겼다. 이에 발맞춰 등산 인구도 빠르게 늘어났다. 공인 된 그 길들을 나 또한 맘껏 누리고 있었다. 산짐승들을 위한 길은 방치된 채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선을 넘지 않듯, 녀석들도 그 선을 무시로 넘나들지 않기를 무심결에 바랐는지도 모른다. 선 너머에서 새끼 낳고 알콩달콩 가족을 이루며 평화롭게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었다. 나와는 분리된 별개의 세상이 거기에 있으리라 여겼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선을 멧돼지들은 알고나 있을까?

이제 녀석들은 수시로 선을 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마이웨이라고 지칭하며 오르내리던 산길은 원래 녀석들의 터전이었다. 인간이 정한 질서를 같은 무게로 녀석들에게도 적용하려 했던 오만이 부끄러웠다.

잣나무에서 청솔모가 잣 껍질을 튁튁 아래로 뱉어 내고 있었다. 산비둘기는 오가는 등산객에 아랑곳없이 구구거리며 먹이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까마귀가 내 머리 위를 휘돌더니 까욱까욱 소리를 지르며 날아갔다. 돌아보니 산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무심히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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