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이번에도 많이 좀 도와주셔요.”

최풍원이 본론을 꺼내기 전에 밑밥부터 뿌려두었다.

최풍원은 쉽사리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이야기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지 영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지금 북진본방에서 필요로 하고 있는 물건들을 우갑 노인에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일테면 지금 북진본방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발설하고 도움을 청하는냐, 아니면 당면과제를 숨기고 온갖 허장성세로 우갑 노인을 현혹시켜 필요한 물건을 얻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최풍원도 전자를 택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솔직하게 북진본방의 형편을 이야기했다가 혹여 도움을 거절당하면 어쩔까 하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후자를 택해 우갑 노인을 속이고 원하는 바를 성사시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갈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후자는 우갑 노인을 속이는 일이라 지금까지의 관계를 생각해도 그것은 배신하는 행위란 생각이 들어 자꾸 머뭇거리게 되었다. 최풍원이 지금까지 장사를 하며 장사꾼들이 이득을 남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속이는 속임수를 보아왔다. 그렇지만 속이는 것도 상대에 따라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최풍원에게 우갑 노인은 부모와 같은 대상이었다. 어찌 보면 그 이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갑 노인을 그리 대하면 안 될 일이었다.

“풍원아, 장순갑을 조심하거라.”

우갑 노인이 뜬금없이 북진임방 장순갑이 이야기를 했다.

“갑자기 순갑이 형님은 왜요?”

최풍원이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얼마 전 여기 상전에 왔었다.”

“윤 객주 어른 상전을요?”

“그렇다.”

“순갑이 형님이 왜요?”

“우리 상전과 직접 거래를 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순갑이 형님이요?”

“그래!”

“분명 북진임방 순갑이 형님이라고요?”

도무지 믿기지 않아 재차 확인을 했다.

“그렇다!”

우갑 노인이 북진임방 장순갑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최풍원은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장순갑이 충주 윤 객주 상전을 찾아왔다면 아마도 최풍원이 청풍 인근 장마당을 돌아다니던 그 무렵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석이 혼자 북진본방 일을 꾸려나가느라 쩔쩔 매는 것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최풍원이 더욱 놀란 것은 북진본방의 모든 임방들은 본방을 통해 물건을 공급받고 장사를 해서 거둬들인 물건은 본방을 통해 처분을 하기로 약조를 했는데 그것을 어기고 단독으로 몰래 일을 도모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임방주들 중에서 그랬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순갑이 형님은 최풍원에게 그리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장순갑이 있기까지는 최풍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풍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북진에서 뙈기밭이나 파먹으며 근근이 끼니나 연명하고 있었을 구차한 처지였다.

“그래 어떻게 하셨어요?”

“뭘 어떻게 했겠느냐? 우리 상전에서는 일일이 장사꾼들과 거래를 할 수 없으니 본방을 통해 하라고 했지.”

“어떻게 순갑이 형님이 내게 그럴 수 있지?”

최풍원은 우갑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북진본방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 기로에 서있는지 누구보다도 장순갑이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장순갑이 지금과 같은 때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뒷구멍에서 딴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최풍원의 등 뒤에 비수를 꽂는 것이나 한가지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한 최풍원은 배신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목전에 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도 최풍원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최풍원은 장순갑의 일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어르신, 오늘 우리가 가지고 온 물산들을 처분해도 지난 번 상전에서 대준 물건 값에는 어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거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 하루 팔아 하루 사는 뜨내기 장사꾼도 아니고 전을 차려 하는 장산데 어떻게 깔끔하게 계산이 될 수 있겠느냐? 큰 장사는 항시 빚을 깔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가져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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