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용봉산성에서 동평산성은 멀지 않았다. 용봉산성에서 마성산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작은 봉우리를 올라가보니, 널찍한 공터가 나왔다. 이곳이 바로 동평산성지였다. 이곳도 전망이 아주 좋다. 옥천읍과 군서면 쪽의 마을과 들판이 다 보였다. 그리고 식장산이 바로 코앞이다. 산봉우리는 용봉보다 높은데 그래도 전망은 용봉만은 못한 것 같았다. 여기도 역시 관산성의 부속성이나 보루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잡초가 우거진 속에서 동평산성 표지석과 안내 표지판을 찾아내었다. 표지석과 안내판을 읽어보고 나서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산성의 흔적을 찾았다. 설명에는 둘레가 247m라고 되어 있고 산봉형(蒜峰形) 석축산성이라고 했다. 산봉형 산성이란 마늘 모양처럼 윗부분은 평평하고 사방이 급경사인 지형에 맞추어 쌓은 성을 말한다.

성벽은 완전히 무너져 돌무더기만 남았는데 서쪽 성벽은 조금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한 100m정도가 붕괴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서 축성의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 돌은 다른 곳보다 크다. 큰 돌을 정교하지는 않지만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쌓았다. 성석은 세로 30cm, 가로 40~50cm정도 되었다. 사람들이 들고 나르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큰 돌을 아래에 놓고 조금 작은 돌을 위에 쌓았다. 무너진 면을 보면 축성의 방법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바깥쪽은 큰 돌을 쌓고 안쪽에 잔돌, 자갈과 흙을 넣는 방법이었다. 무너져 내린 곳은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무너진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기와편과 토기편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백제 때 쌓은 산성을 고려나 조선시대에 와서 다시 고쳐 쌓기를 한 흔적이 아닐까 생각됐다.

또는 관산성과 용봉산성을 백제가 축성했다면 신라가 관산성을 차지하고 나서 동평산성과 마성산성을 축성했을 것으로도 짐작됐다.

커다란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바르게 쌓았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돌의 재질이다. 새로 최근에 쌓은 성벽처럼 돌이 깔끔하다. 물때를 검게 입지도 않았다. 깨끗한 돌은 푸릇푸릇한 바위옷을 군데군데 입었고 초록색 이끼식물이 조금 퍼졌을 뿐이다. 보기에 한 50년 전에 새로 쌓은 것처럼 보였다.

제일 높은 북쪽 장대 부분에는 문지라 여길 만한 곳이 보이는데 남쪽에는 수구나 암문을 찾아보았으나 발견할 수 없어서 관산성 쪽으로는 어떻게 통했는지 궁금했다. 관산성의 망루 역할은 용봉산성이나 마성산성이 하고 동평산성은 고개를 지키는 산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북쪽 군서면 동평리에서 남동쪽 옥천읍 양수리로 통하는 고갯길을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평산성은 성의 옛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어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산성을 찾아다니면서 이 정도 옛 모습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하긴 무너진 성벽이나 온전한 성벽이나 옛 사람의 아픔을 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성돌에 묻어 있는 민중의 피가 보이기 시작하고 성벽 돌 틈에서 새어나오는 한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니 나도 이제 곧 산성에 취하게 될 것만 같다. 정상인 마성산은 아직 멀었다. 몇 봉우리의 등성이를 넘어야 한다. 길도 정확하지 않다.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포기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언제 다시 오랴 하는 생각도 들어 앞으로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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