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풍원이가 단리에 임방을 두었던 것도 놋장골의 유기 공방들을 생각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복석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리 임방의 운영방법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최풍원은 단리임방을 이용해 청풍도가에 공급되는 놋장골 유기를 끊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유기장들이 청풍도가에 볼모처럼 잡혀 있으니 한동안은 그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현임방도 그렇고 단리임방도 그렇고 가장 급한 것이 양식인 것 같소이다.”

“거뿐만 아니라 모든 임방에서 가장 절실한 물건이 곡물이요. 난리통에도 먹어야 하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 상중인데도 먹어야 하니 사람이 먹지 않고 우째 살겠소? 그런데 청풍도가에서 틀어쥐고 내놓지 않고 있으니…….”

최풍원의 말에 양평 김상만 임방주도 곡물이 급하다고 물목을 올렸다.

“양평도 그렇단 말이오?”

최풍원이 놀랐다.

양평은 청풍관내에서 가장 넓고 기름진 전답이 있는 곳이었다. 거개의 청풍 사람들이 양평 곡물을 먹고 산다고 해도 헛말은 아니었다. 그런 양평에서 곡물이 급하다니 청풍사람이라면 누가 들어도 곧이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양평 곡물도 이미 청풍도가 수중으로 들어간 지 오래전이오. 곡물이 문제가 아니오. 양평 뜰 쌀은 볍씨 뿌릴 때부터 청풍도가 것이 되었소!”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양평 뜰이 양평 사람들 것인 줄 아오? 거개가 토호들, 관아 아전들, 청풍도가 장사꾼들 땅이오. 그놈들은 천하에 몹쓸 도척들이오. 도둑도 그토록 모질게 빼앗아가지는 않을 것이오. 추수를 하고 타작이 끝나자마자 잘 여문 알곡들은 몽땅 거둬가고, 덜 여문 쭉정이만 소작농들에게 일 년 농사 지은 품삯이라고 주니 농민들이 무슨 수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겠소. 토호에게 빌려먹고, 관아 장리쌀 꿔다먹고, 청풍도가에서 외상으로 갔다먹으며 일 년 가고 이 년 가니 빚 없는 농민이 없소. 그래도 빌려먹을 형편이라도 되는 집은 굶지는 않지만, 빌려다먹고 갚지를 못해 빚이 첩첩한 집은 그나마도 꿔주지를 않으니 가솔들이 전부 굶어죽게 생겼소이다.”

김상만 임방주도 양평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전했다.

“지금 임방주들께서 얘기를 했다시피, 이번에 나도 장마당을 돌아보니 가는 곳마다 청풍도가에서 활개를 치고 특히 곡물이란 곡물은 싹쓸이를 하고 있었소이다. 이들이 곡물을 몽땅 거둬들이고는 사람들이 굶어죽어 나가는 판에도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은 곤경에 빠진 고을민들을 더욱 옥죄기 위한 것이 틀림없소이다. 열흘 굶어 남 집 넘지 않는 사람 없다 했소. 굶다굶다 죽을 지경이 되면 토호나 관아나 도가를 찾아가 무슨 약조인들 하지 않겠소? 이놈들은 그걸 노리고 그걸 미끼로 사람들을 수탈하는 것이오! 이 목사리를 끊어줄 수 있는 방안이 없겠소?”

최풍원이 임방주들에게 청풍도가와 사람들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청풍도가와의 상권 다툼은 이것부터 시작해야 할 듯 싶었다.

“대주, 뻔한 것 아니겠슈?”

광의 임방주 김길성이었다.

“뻔한 그것이 뭐요?”

“곡물을 구해다 굶고 있는 사람들을 먹이는 거 아니겠슈?”

“아무것도 없어 관아에서조차 내버린 사람들이여.”

이번에도 장순갑이었다.

“오죽하면 그 지경이 되었을까. 사람이 불쌍하지 않슈?”

“우리가 그런 것도 아니고,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데 왜 우리가 그런디야?”

 장순갑을 보면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도 헛말이었다. 예전에야 쥐뿔도 없어 그럴 수 있었다손 쳐도 이제는 최풍원의 덕에 살만해졌다. 살만한 정도가 아니라 제법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살림도 택택했다. 그런데도 저만 생각하지 남을 돕겠다는 생각은 씨도 없었다.

“나도 광의 임방주 말에 찬동하오. 나 역시 장사도 사람 마음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없으면 무슨 일인들 되겠소. 어려울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은 인지상정이오. 장사가 돈도 벌어야겠지만, 돈보다 사람이 먼저요.”

최풍원이 김길성이 편을 들었다.

“우리 코가 닷 발은 빠졌는데, 무슨 주제 넘는 소리여! 본방도 돈이 없어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무슨 놈의 고을민을 구제해!”

장순갑은 본방에서 임방주들이 모여 하는 일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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