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OECD 가입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1위. 원인은 가정환경과 학교폭력 및 왕따. 잊을만하면 어김없이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곤 한다. 친구들의 지속적인 폭력과 따돌림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당사자의 괴로움은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오죽 견디기 힘들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을까. 그 부모의 심정을 또 어떠하겠는가? 가해 학생은 학교폭력위원회(학폭위)를 거쳐 합당한 벌을 받겠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사면되지는 않는다. 내막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학교폭력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지금은 중2인 필자의 큰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시외의 초등학교에 다니고,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야하는 거리라 아내가 등하교를 시켜주었다. 하루는 아내가 하교 시간에 학교에 갔는데, 마침 어떤 남자 아이가 큰딸의 멱살을 바투 잡고는 벽에 2~3번 쿵쿵 밀치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아내는 놀라서 달려갔고, 큰딸은 엄마를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그 사이 선생님이 달려왔다. 선생님도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내는 고민하다가 선생님한테 그 남자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고, 남자 아이는 장난이 심한 또래 여자아이들 때문에 평소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그날 필자의 딸이 지나가면서 툭툭 치는 장난을 쳤다고 한다. 몇 번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반복되자 참지 못하고 딸의 멱살을 잡았던 것이다. 아내는 남자 아이를 꼭 안아주고 딸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로 사과하라고 시켰다. 그 이후 남자 아이와 딸은 초등학교를 졸업할때 까지 아주 친하게 잘 지냈다.

그 남자 아이는 조모와 함께 시골에서 생활한다. 이혼해 따로 사는 엄마, 외지에서 경제생활을 하는 아빠. 한창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시기에 가정환경으로 인해 위축되고 수줍은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의 장난에 대응할 힘이 없었고, 참다 참다 폭발을 한 것이었다. 남자아이는 가해자이기 전에 이미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필자는 비슷한 어린 시절을 경험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만약 처음의 상황만 보고 무조건 학폭위를 열어 남자아이에게 징계를 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두 아이는 영원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남았을 것이고, 그들은 배움의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또 몇 번의 학폭위를 경험했다. 가해자, 피해자를 구분하기 전에 그들은 모두 같은 친구이고 어린 청소년들이다. 청소년들은 서로 싸우고 다투며, 속상해하고 후회하고 화해하면서 사람관계를 배우는 시기이다. 어른들은 가해자가 진짜 가해자인지, 피해자가 진짜 피해자인지 깊이 들여 다 보려 하지 않음으로써 그 배움의 기회를 빼앗고 있다. 학교 선생님들은 일이 커지기 전에 학폭위를 열고 하루빨리 행정처리가 마무리되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해당 학생들은 영원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남고, 마음의 응어리는 풀어지지 않는다. 청소년 시기 친구들 간의 다툼은 잘 마무리만 하면, 오히려 사람관계를 배우는 좋은 배움의 재료가 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학부모, 학교 선생님, 학폭위가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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