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관산(管山)이 옥천의 옛 이름이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그런데 관산성의 실제 위치에 대한 의견은 학자마다 다르다. 현재 삼성산성이라 불리는 곳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환산성(고리산성)이라 보기도 한다. 대부분 문헌에서 옥천읍을 감싸 안은 산줄기의 삼성산성이 관산성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관산성(삼성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의 산성 줄기를 답사하기로 했다.

삼성산성에 오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잡초더미 속에 있는 표지석 앞면에는 삼성산성이라 했고, 뒷면 설명에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관산성이라고 했다. 성터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활엽수와 잡초가 우거진 돌더미를 헤집으며 성의 흔적을 찾는다. 참으로 특이하게 생겼다. 남벽은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서에서 동으로 늘어지고, 북벽은 능선에서 북쪽 기슭으로 내려가서 역시 동서로 길게 뻗었다. 테메식 산성이라고 할 수도 없고 골짜기를 감싸 안지도 않았으니 포곡식산성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냥 남벽은 높고 북벽은 낮은 반월형 산성이라고 해야겠다. ‘삼성산성’이라는 이름처럼 세 겹으로 이루어진 겹성이다. 남벽은 능선에서 2~3m 정도 아래에 280m 정도이고, 북벽은 정상에서 30m 아래에 1차 성벽, 거기서 50m 쯤 떨어진 곳이 2차 성벽, 거기서 70m 정도 떨어진 곳에 외성인 3차 성벽이 있다. 성에서 서북쪽인 월전리 성왕로 쪽에서 올라오는 적을 방어하는 목적이 큰 성으로 보인다. 내성은 석성이고 외성인 3차 성벽은 토석혼축 산성이다.

북벽의 3차 성벽인 외성의 길이는 약 500m정도로 보인다. 정상에 장대지가 있고 기와편이 보인다. 동쪽과 서쪽에 문지가 있다. 서쪽 정상 부근의 장대지에는 문지가 있는데 이 문을 통해 구진벼루 쪽으로 출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석축한 성벽의 높이는 돌무더기의 양으로 보아 5m는 족히 되어 보였다. 관산성은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성 띠의 관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생각에 이곳 네 개의 산성과 지금은 옥천읍 시가지가 되거나, 경부고속도로, 경부선철도 등으로 거의 훼손된 삼거리토성, 삼양리토성, 서산성과 함께 일곱 개의 성을 통틀어 관산성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성들이 옥천 지역을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북쪽에 고리산성이 있고, 서북으로 노고성 등 몇 개의 성이 더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일곱개의 산성의 줄기는 백제에서 보면 최전방 방어선이고 신라에서 보면 삼년산성을 사령부로 한 전진기지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관산성전투와 같은 국가의 운명을 건 국제전이 이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옥천 구읍에서부터 월전리에 이르는 이 벌판이 바로 전쟁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산성을 차지하면 옥천 고을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신라와의 경쟁에서 승리의 이정표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무너진 돌더미에서 나는 민초들의 한이 보인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쟁패의 현장에서 민초들은 어이없이 죽음을 맞은 것이다. 우거진 활엽수 사이로 구진벼루가 보인다. 구진벼루는 여기서 1km도 안된다고 한다. 바로 저기서 성왕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기에 백제의 꿈도 성왕의 꿈도 여기서 사그라졌다. 용봉으로 향하는 발길에 차이는 풀잎마다 묻어 있을 백제의인의 꿈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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