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닥 인심이 세상인심이고, 세상인심이 농민들 인심이었다. 농민들 인심이 각박해지니 어디를 가나 죽는 소리만 들끓었다. 이러니 살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이런 와중에서도 득을 보는 사람들은 부자와 큰 장사꾼들, 그리고 관리들이었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죽어나가도 뒷구멍으로는 좁쌀 한 톨까지도 빼먹을 것이 없나 궁리하는 놈들이었다. 도둑놈이 불을 질러놓고 앞에서는 같이 불을 끄는 척 하며 혼란한 틈을 타 물건을 빼돌리는 그런 파렴치한 것들이 그런 놈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치사하고 더러운 놈들이 남의 밥그릇을 빼앗는 놈과 남의 약점을 이용해 제 배를 채우는 그런 작자들이었다. 농민들은 시키는 대로만 따르면 나라님이 자신들의 힘겨운 살림을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양반들이나 지주들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보고 곳간 문을 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만드는 법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목줄을 죄는 올가미가 되었다. 하는 일마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니 차라리 나라님이 당신 몸이나 보존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잠이나 잤으면 하는 마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라님이나 관리들은 농민들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뭔가를 자꾸 만들어내며 호달구고 있었다.

농민들을 편하게 해주겠다며 또다시 근래에 만든 금납제가 그러했다. 종래의 세금은 균역법에 따라 베를 내는 양포세였다. 그 전에는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본래는 현물을 공물로 바쳤었다. 애초에는 조선 팔도 각 고을에서 나오는 현물을 세금으로 바쳤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있어 모든 세금을 쌀로 통일해서 내게 한 것이 대동법이었다. 그러나 쌀이 귀한 산지에서는 자신들이 생산한 특산물을 팔아 다시 쌀을 사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났다. 그래서 다시 양포세로 바뀌었다. 양포세는 베를 세금으로 관아에 바치는 제도였다. 베는 삼과 목화를 재배하거나 누에를 키워 뽑은 실로 피륙을 짜는 것이었다. 이는 집집마다 기본적으로 짓는 농사였다. 가솔들이 옷을 해 입어야 하니 집집마다 아녀자들이 일상으로 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러니 베를 세금으로 내는 것이 일견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갖은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그런 문제들은 농민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리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생각해낸 편법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것이었다. 고을민들이 세금으로 낸 질 좋은 베는 빼돌려 착복하고, 대신 관아 창고에는 쓸 수도 없는 베들을 따로 만들어 개수만 채워놓는 수법이었다. 그러다보니 이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 금납제였다. 이번의 명목 역시 백성들이 편리를 위해 돈으로 세금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돈이 귀해 일반적으로 상용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돈은 한양 같은 도성이나 큰 고을에서 그것도 양반들이나 지주들 그리고 큰 거상들 사이에서만 통용이 될 뿐이었다. 향시는 물론 장돌뱅이들이나 장꾼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물물교환이 통상적인 거래방식이었다. 그러니 일반 농민들에게 돈은 아주 귀한 것으로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나라에서 돈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세금을 내지 않고 견딜 수는 없었다.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양반들이나 지주들뿐이었으니 농민들은 쌀이나 베를 가지고 그들을 찾아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돈을 가진 자들이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세금을 내기위해 돈을 찾는 농민들이 많으니 이들은 돈값을 올렸다. 결국 쌀 한말이면 되던 세금이 두 말 세 말로 베 한 필이면 되던 세금이 두 필 세 필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래도 쌀이나 베가 있는 농민들은 그렇게라도 세금을 냈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농민들이 문제였다. 대부분 농민들은 당장 먹을거리도 없어 끼니도 끓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금을 내라고 하니 이들 역시 양반들이나 지주들을 찾아가야만 했다. 쥐뿔도 없는 농민들은 더 가혹한 세금을 내야만 했다. 당장 세금을 내지 못하면 관아에 잡혀가 하는 곤장을 맞게 생겼으니 돈 가진 자들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들을 고대로 감수해야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농민들은 돈부터 빌리고 일 년 농사를 지어 가을 추수기에나 갚아야 했다. 그러니 그 이자까지 감당해야했다. 지주들은 세금으로 내야하는 쌀 두세 말 값에다 일 년 이자까지 붙였으니 농민들은 금납제 이전에 한 말이면 되던 것을 두세 말, 심지어는 한 섬 가까이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이었다. 돈을 빌려도 가솔들 입에 들어가는 낱알 한 톨 구경도 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양반이나 지주들, 관리들 뱃속으로 쳐 넣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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