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성왕이 변을 당한 것은 그 유명한 관산성 전투이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에게 빼앗겼던 관산성을 도로 찾으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백제는 가야, 왜와 연합해 대군을 이루어 태자 부여창의 지휘에 따라 신라에게 빼앗긴 관산성을 침공했다. 신라는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과 삼년산성의 비장 도도가 부여창의 백제군을 협공했다. 성왕은 태자를 격려하려고 다만 50명의 친위대만 이끌고 이곳을 지나다가 매복 중이던 도도에게 생포됐다.

재위 31년간이나 백제의 중흥을 위해 많은 업적은 남긴 왕이 한낱 신라의 병졸에게 목을 늘이고 자신의 칼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일부 학설에 의하면 부여창의 군대가 관산성을 이미 탈환했으나 재탈환하려는 김무력 장군의 극렬한 공격에 백제군이 어려움에 처하자 격려하러 가던 길이었다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불과 1km도 안 되는 관산성에서 태자가 내려다보는 시야 안에서 말이다. 부왕의 목을 받아든 젊은 태자는 이성을 잃고 흥분해 작전도 없이 신라군에게 덤볐을 것이다.

성왕이 거동한다는 첩보를 듣고 도도를 매복시킬 정도로 노련한 신라의 김무력은 젊은 태자의 이런 무모한 공격을 기다렸을 것이다. 고리산성을 거쳐 백골산성까지 쫓긴 2만9천600명의 백제 군사는 전멸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백제는 성왕이 애써 일구어놓은 국력을 백골산성에서 붉은 피로 흘려보낸 것이다. 이것이 구진벼루의 비극이다. 성왕은 행차를 더욱 신중하게 행했어야 한다. 조정에는 관산성 공격을 찬성하는 친왕권파와 반대하는 귀족들의 파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한다. 세작들의 책략도 있는 현실을 바로 알아 신중하게 거동했어야 한다.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성군을 잃어버린 손실도 있었지만 밖으로 가야나 왜와 동맹이 무너지고, 신라의 공격은 더욱 거세어졌을 것이다. 안으로는 많은 군사를 잃고 왕과 함께 했던 국가 운영의 주역들을 함께 잃어버렸으며 관산성 전투를 반대했던 귀족들이 득세해 위덕왕(부여창)의 국가 운영 정책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백제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생각한다. 구진벼루 사건은 백제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지 않고 백제가 승리했다면 삼한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신라가 삼년산성까지 쫓기어서 전멸하다시피 했다면 어찌 됐을까? 가야가 신라 대신 백제에 흡수되고 삼년산성은 백제가 차지하여 신라의 국운을 위협했을 것이다. 삼한통일의 형세가 백제로 기울어 백제가 통일을 이루어냈다면 우리 문화의 색깔도 달라졌을 것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백제문화의 가치가 오늘을 지배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큰 사건으로도 방향이 바뀌지만, 한 순간 지도자의 판단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된다. 부여 사람들은 아직도 성왕을 존경하고 어이없는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월전리 성왕 사절지(死節地)는 관산성에서 서북으로 800m 거리라고 한다. 관산성은 여기서 지척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여기서 남쪽 산줄기에 관산성지, 용봉, 동평성, 마성산 줄기가 뚜렷하다. 우두커니 유적비를 바라보다 비석을 한번 쓰다듬고 관산성으로 향했다. 구진벼루여! 성왕이여! 백제의 운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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