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내가 사는 이웃에 외롭게 사는 노부부가 있다. 이들 부부는 아들 셋을 두고 있다. 평생 막노동을 하며 자식 하나만은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고 가르쳤다. 그러나 자식들은 스스로 잘된 것처럼 헤어져 살며 어느 자식도 부모 모실 생각은 하지 않고 무관심했고, 형제간에도 서로 미루고 다투었다.

가끔 자식들 집에 찾아가면 손님처럼 대접만 받고 돌아온다고 했다. 혹 눌러 살려하지는 않나 해서 자식과 며느리의 눈치가 어찌나 심한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불청객처럼 있다 돌아왔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면서 서운한 마음에 눈시울을 적시는 것을 보니 내 마음도 서글펐다.

효도를 받기 위해 자식을 기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들의 야속한 행동에 가슴이 너무나 아파 절친한 이웃이라고 우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그 할머니였다. 늙은 몸에 힘들지만 폐지를 모아 팔아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노후 준비 못한 것을 한없이 후회했다.

나는 그 노부부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생을 자식들에게 손 벌리는 처지가 됐다면 나도 그 노부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푼 안 되는 연금이지만 매달 받아쓰도록 해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자식을 낳아 기른 부모는 누구나 자식을 위해 희생과 양보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보다 내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랄뿐이다. 피땀 흘려 번 돈이라도 자식에게 주면서 아까워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으로 기르고 가르치며 한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이렇게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바로 아는 젊은이가 얼마나 될까. 요즘 부모 학대가 날로 심해지고 그 으뜸이 자식이라는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 마음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어느 자식에게도 부모사랑은 똑같은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식이 결혼하면 부모에 대한 효심이 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핵가족시대에 각각 따로 사는 시대라 사랑으로 기른 혈육의 정이라 해도 부부사랑보다 더 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독하게 사는 노인이 늘어만 가고 홀로살기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허다하다. 자식이 있다 해도 돌봄이 없어 독거노인처럼 홀로 외로움을 달래가며 쓸쓸히 살아가는 노인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고령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노인들의시련이며 자화상이 아닐까.

자식은 효(孝)하는 것을 계산할지 몰라도 부모는 자식을 기름에 계산을 하지 않는다. 요즈음 효도계약서를 쓴다는 세상이다. 돈 많은 재산가가 하는 일이지만 재산 없는 가난한 노인이야 꿈도 꿀 수없는 일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들 가정의 기초가 무너지는 불행한 징조이다.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노인들을 더욱 슬프게 한다.

효(孝)는 선택이 결코 아니다. 여건이 되면 하고 그렇지 못하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요, 먹을 것이 없어도 해야 하고, 잠 잘 곳이 없어도 해야 하는 인간이 살아 갈 길이요, 반드시 지켜야 되는 인생의 필수과목이리라.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부모님 마음 편하고 즐겁게 해드리는 것, 이것이 자식의 도리요, 효의 근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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