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수필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이 용갈 씨 마음을 달뜨게 한다. 모름지기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는데 온종일 경비실을 지키고 있는 자신이 새삼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 일자리마저 떨어질까 봐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자신이 일을 그만두면 병석에 있는 아내 치료비와 생활비 때문에 자식들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일이 난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파트 앞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이 바람에 떠밀려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마구 몰려다닌다. 저 고목에 찰싹 달라붙어서 울던 매미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은데 어느새 낙엽이 지고 있으니 세상 참으로 빠르구나 하는 생각에 골똘히 무엇인가 생각하는 용갈 씨!

“아저씨! 낙엽 치우기 힘드시죠?”

용갈씨의 상념을 깬 사람은 2동 대표 Y여사였다. 그는 관리사무소의 자질구레한 일에서부터 사사건건 참견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잔소리가 심한, 경비들이 가장 꺼리는 인물이다.

“아, 예, 뭐 어쩌겠어요.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마지막엔 낙엽이 되는 이치가 하늘의 순리인 것을요. 그저 자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요.”

갑자기 Y여사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지더니 용갈 씨를 쳐다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와! 아저씨 철학자 같다.”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용갈씨는 한때 등용문을 힘차게 오르고 싶어 하던 시절이 있었다. 시인이 되어 아름다운 시어도 구사하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도 알리고도 싶었지만,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단념한 게 이미 오래전 일이다.

나도 집에 있었으면 친구들처럼 삼식이로 불릴까? 아니다. 지금도 밥을 짓고 빨래를 해야 하니 삼식이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아직 일할 힘이 남아있어서가 아니라 일을 더 해야 했다. 아니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할 팔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 많이도 돌아다녀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한결같았다. ‘연세가 좀 많은 것 같습니다.’ ‘저희가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나 하고 자포자기하던 용갈 씨!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웃 아파트 경비원 모집에 낸 원서가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아파트 경비일 이라는 게 그리 녹록지 않았다.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는 내용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용갈 씨 앞에 서 있는 동대표만 해도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을 자주 시키곤 했다. 쉬운 예로 경비실에 받아둔 택배를 자기네 집으로 가져다 달라고 한다든지 가족들이 치울 수 있는 물건도 무겁다며 경비실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럴 때마다 사람 좋은 용갈 씨는 말없이 거들어주곤 했다.

뜬금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용갈 씨 앞에 서 있는 이 동 대표는 무슨 말을 더하려는 것일까.

“아저씨, 저쪽 은행나무 밑에 누가 은행잎으로 뭘 만들어놨어요. 보기 싫어요. 좀 치우세요.”

그 은행잎은 용갈 씨가 떨어진 잎을 치우지 않고 일부러 모아두었다가 하트모양을 만들어 놓은 거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혼자 그 부근을 산책하며 가을을 즐기고 있었는데 저 동대표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랴.

“지저분해 보여요.”

“저는 도망가는 가을 붙잡아두려고 일부러 쌓아놓은 건데요.”

“네?”

“아파트에 사는 분들은 너무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는 것 같아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면 좀 센티해지지 않을까 싶어 그랬어요.”

“뭐요? 정말 철학자 같은 소리 하시네!”

그 말끝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장 치우겠습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용갈씨! 뱉은 말을 서둘러 주워 담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번영회장이 알면 더 큰 소리 낼 수도 있어요.”

“예, 알겠습니다.”

멀어져가는 동대표를 바라보는 용갈씨 마음이 혼란스럽다. 통행이나 환경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뿐더러 며칠 후에 치우려 한 게 이런 유쾌하지 못한 일을 불러오다니….

용갈씨가 창고에 들어가 버리는 현수막으로 만든 커다란 자루를 가지고 와서 은행잎을 담기 시작한다. 잠잠하던 서쪽에서 바람이 간간이 불어오는 것을 보니 오늘 해도 어지간히 기운 것 같다.

유치원 학원 차량에서 노란 가방을 둘러멘 아이들이 무리 지어 내린다. 정말 짹짹거리는 노란 병아리 같이 느껴져 손자처럼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이 용갈 씨가 작업하고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온다.

“와! 예쁘다. 우리 여기서 놀자.”

“할아버지 그거 치우지 말아요.”

어느새 사내아이 서너 명이 은행잎 위에 엎어진다. 그 뒤를 따라 여아들도 덩달아 뒹굴며 좋아한다. 어떤 아이는 은행잎을 손으로 떠서 친구들에게 뿌리기도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갈씨! 마음이 이상야릇하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그도 아이들과 같이 그 은행잎 속에 파묻힌다. 무척 포근하다.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 언덕처럼 편안하다.

“아저씨!”

고막을 찢는듯한 고함에 몸을 일으켜 바라보니 언제 와있었는지 동대표와 번영회장이 몹시 화난 얼굴로 용갈씨를 노려본다.

“아니, 은행잎 치우라고 했지 언제 아이들하고 놀아달라고 했어요.”

혀를 끌끌 차는 동대표의 등 뒤에는 번영회장이 무슨 쇼핑백을 들고 서 있다가 앞으로 걸어온다. 그 걸음걸이가 사뭇 위압적이다.

“아저씨! 날씨가 추워져서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저희가 월급 못 올려드려 미안한 마음에 내복 한 벌 샀어요. 그리고 저 은행잎은 바로 치우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들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무슨 마음에서인지 더 말을 않고 그 자리를 떠나는 동대표와 번영회장, 꿈속을 거닐다가 깨어난 듯한 용갈 씨! 뭔가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이상야릇한 조화를 이룬다.

지난해 사다 준 내복도 아직 멀쩡한데….

남자 것이어서 아내는 못 입겠고….

퇴근하는 용갈씨 앞에 폐지를 손수레에 골싹하게 싣고 끌고 가는 등이 굽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뒤에서 손수레를 밀어주며 쇼핑백이 떨어지지 않고 잘 보이도록 폐지를 묶은 끈 속에 끼워 넣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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