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구진벼루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어이없게 전사한 운명의 갈림길이다.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개천이 굽이돌아 흐르는 곳에 벼랑이 있고, 벼랑 아래에서 천오백년 전 백제의 운명이 뒤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 구진벼루는 ‘굽은 개천에 있는 벼랑’이라는 의미의 옥천 월전리 현지 말이다. 달리 ‘구진베루’ ‘구진벼리’로 부르기도 한다. ‘개천’을 한자 표기로 ‘狗川’이라고 쓰다가 구진벼루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구진벼루에서 관산성이 바로 코앞이고, 관산성에서 보면 구진벼루가 바로 발아래이다. 방귀도 크게 뀌면 들릴만한 거리이다.

오늘은 구진벼루와 관산성으로 떠난다. 남청주 나들목으로 들어갔나 싶은데 금방 옥천이다. 먼저 구진벼루로 차를 몰았다. 옥천읍에서 월전리로 들어가는 37번 도로 이름이 성왕로이다. 성왕로는 옥천에서 추부를 거쳐 부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성왕은 ‘마전’이라고 하는 추부에서 태자인 부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을 지원하다가 성왕로를 따라 이곳으로 말을 달렸을 것이다.

국궁연습장인 관성전 못미처에서 우회전하여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길은 월전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과 구진벼루라는 벼랑이 있는 개천의 둑방길과 갈라진다. 월전리는 마을 뒤쪽 서북쪽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 금강 줄기인 시냇물이 굽이쳐 흐른다. 마을 쪽으로는 평평한 농지가 형성되어 있고, 시냇물을 건너는 절벽이다. 시냇물은 맑고 깨끗한데다가 기암기석이 녹음 속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는 절경이다. 지리 교과서에서 우리나라 강촌을 설명할 때 표본 같은 농촌 마을이다. 군데군데 도회지 사람들의 전원을 낀 별장이 보인다. 천오백년 전 엄청난 역사를 다 잊어버리고 매우 평화스러워 보인다.

마을 앞을 지나 구진벼루를 곁에 두고 고리산성으로 건너가는 소로가 있다. 마을 남쪽으로 관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을 지나 장령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옥천읍 시가지를 감싸 안고 꿈틀거린다. 서북쪽으로 식장산이 우뚝 솟아 대전과 옥천의 경계를 이룬다. 신라와 백제의 경계도 이렇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식장산은 보기 흉한 통신탑을 머리에 이고 있어 힘겹다. 옛날 봉수대가 있었을 지리에 지금은 전파의 봉수대가 서 있는 셈이다.

강둑에 나 있는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서 계속 내려가니 냇물이 한번 구비치고, 절벽과 농지의 위치가 뒤바뀐 곳에 성왕 유적비가 서럽게 서 있었다. 잡목이 우거지고 쑥대가 무릎까지 올라온 가운데에서 비신은 그나마 말끔하다. 부여 사람들이 읍내 중앙에 거룩하게 모셔놓은 성왕을 옥천 사람들은 어이없는 죽음이라는 슬픈 사연으로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백제 제26대 왕인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다. 서기 523년에 왕위에 올라 554년 구진벼루에서 변을 당할 때까지 31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 서기 538년 협소한 웅진에서 광활한 사비로 천도하여 국호도 남부여로 고치면서 백제 중흥을 꿈꾼 야심찬 군왕이었다. 고구려, 신라, 가야, 왜 등 주변 나라들과 경쟁하면서 찬란했던 문화와 나라의 위상을 회복하려 무진 애를 쓴 군왕이다.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땅을 70여년 만에 도로 찾기도 하고 가야에도 세력을 뻗치었다. 신라 진흥왕과 화친과 다툼을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삼한통일을 준비하였다. 심지어 딸을 진흥왕의 후비로 보내고 겉으로는 화친의 손을 내밀면서 기회를 엿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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