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버튼을 누르자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복사가 된다. 미처 눈이 따라가기도 전에 차곡차곡 종이가 쌓인다. 기계가 좋아지니 덕분에 여유가 생긴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것 같아 가져간 책을 두서너 장도 넘기기 전에 500장의 복사가 되어 나오니 세상이 얼마나 좋아진 것인가.

예전 같으면 많은 양을 복사하려고 대학가를 전전하며 고생했는데 요즘은 웬만한 문방구에도 고속복사기가 있어 업무처리가 훨씬 수월해졌다. 혹시나 해 순서를 바로잡으려 하니 가져간 그대로 순번 하나 틀리지 않고 똑똑하게 기억하여 복사되었다.

적은 양은 프린터로 인쇄하지만, 업무적으로 복사를 많이 해야 할 때는 난감했었다. 줄 서 있는 직원들의 눈치 보며 복사하는 것도 그렇고 더디게 복사되어 시간을 빼앗기는 일도 낭비였다.

눈에서 멀미가 날 정도로 빠르게 복사되는 모습에 신기해하는 나를 보고 주인아저씨는 요즘은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한다. 문방구 아저씨의 넉넉한 웃음 속에서 고속복사기가 얼마나 호사를 누리는지는 알고도 남을 것 같았다.

확실하게 임무를 마친 복사기를 보며 3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정어머니는 결벽증에 가깝도록 성격이 깔끔하셨다. 칠십이 넘은 연세에도 어머니의 살림살이는 흠치르르했다. 어머니가 키우는 화초는 늘 생기가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식물도 생명체 다루듯 수시로 이파리를 닦아주고 애정을 쏟으니 어머니의 꽃밭은 사철 화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러 친정에 들렀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가 나고 자라 오래된 집이지만 집 안 구석구석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졌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홀로 아침을 맞이하던 집은 여전히 평온한 모습으로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당신이 떠날 것을 알고 미리 뒷정리를 해놓은 것처럼 집안은 정갈했다. 냉장고나 싱크대의 수납장, 프라이팬의 밑바닥까지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장롱 안에 이불이며 옷장의 속옷까지 각이 지게 개켜놓은 것을 정리하며 이렇게 애지중지하던 살림살이가 아까워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렸을 때 기억 속의 친정어머니는 얼음처럼 차갑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싫증이 난다며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살림살이의 위치를 바꾸었다. 한겨울에도 자식들을 밖에 세워 두고 방안 가득 세제를 풀어 장판을 닦았다. 매일 쓸고 닦는 방바닥을 왜, 세제를 풀어서 닦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청소하는 날이면 그렇게 유난 떠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거라 다짐하곤 했었다.

그런데 절대로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던 동생과 나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와 똑같은 방법으로 살림을 하고 살았다. 어머니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세제를 풀어 거실 바닥을 닦아내야 속이 후련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어머니처럼 장롱과 화장대를 옮기며 방 안의 분위기를 바꾸어야 직성이 풀렸다.

신혼 때에는 손님이 있어도 걸레를 들고 머리카락을 줍는 내 모습이 시누들의 눈에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한 모양이다. 손님 오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쓸고 닦는다고 생각했던 시누들이 20여 년을 가족으로 지내고 나서야 나를 이해했다. 극성스럽게 쓸고 닦는 모습이 가시처럼 눈에 거슬렸던 시어머니는 너무 그렇게 후벼 파고 닦아내면 돈이 붙지 않는다고 성화를 하셨다.

그런 걸 보면 친정어머니는 정말 성능 좋은 복사기다.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셨지만, 나도 여동생도 친정어머니의 성격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 같다. 외모도 그렇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빈소에 놓인 영정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영락없는 내 얼굴이었다. 영정사진을 보는 사람마다 큰딸인 내가 신기할 만큼 어머니를 아주 쏙 빼닮았다고 했다.

젊어서는 잘 몰랐는데 요즘은 가끔 거울을 보다 나도 놀랄 때가 있다. 웃는 모습, 화내는 표정까지 완벽하게 복사해 내 얼굴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어머니 장례식 날 발인예배를 주도하던 목사님이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서로의 얼굴을 보라고 했던 말처럼 가족은 얼굴 속에 서로의 얼굴이 녹아있는 것 같다.

얼굴에 깨알 같은 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베낀 것처럼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복사하고, 나는 어머니를 복사하고, 우리 딸은 또 나를 복사하며 우리네 인생도 복사본처럼 서로 닮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어릴 때 절대로 어머니처럼 유난스럽게 살지 않겠다고 했던 야무진 각오는 어디 가고 나는 엄마의 신혼과 중년의 모습을 그대로 베끼며 사니 말이다. 살면서 더 놀라는 것은 어머니를 닮아가는 모습도 그렇지만 음식도 어머니와 같은 맛을 내니 유전자란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

나이가 들며 게을러지고 느긋해지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내 손은 머리카락을 줍고 먼지를 훔친다. 그런 나를 보고 딸애는 꼭 외할머니를 보는 것 같다며 놀린다. 그러나 원본과 사본이 차이가 나듯 어찌 내가 어머니의 깔밋한 성격을 따라갈 수 있으랴.

복사되어 나온 원본과 사본을 비교해본다. 내가 친정어머니의 삶을 베끼며 살았지만, 어머니만큼 완벽한 살림을 하지는 못했다는 증명이라도 하듯, 글씨의 진하기가 원본만큼 선명하지가 않다. 물론 잉크의 조절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복사기의 기능은 원본 그대로를 복사를 하는 일이 아닌가. 아마도 내 얼굴에는 반드시 ‘원본대조필’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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