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은산별신제는 기원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옛날 은산 지방에 전염병이 유행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 노인이 잠시 낮잠이 들었는데 백마를 탄 장군이 나타났다. “나는 백제를 지키던 장군인데 많은 부하와 함께 억울하게 죽어 백골이 산야에 흩어져 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영혼이 안정을 못하고 있으니 수습해주면 마을에서 역질(疫疾)을 쫓아내 주겠다”라는 것이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꿈에 나타난 장군이 일러준 대로 흩어진 백골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 때부터 역질은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사당을 짓고 백제의 장군을 제사지내게 됐다. 그 제사가 오늘날의 은산별신제이다.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도 없고 무얼 할까 하다가 별신당 뒷산에 당산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혹시 부흥군의 백골이 흩어져 있던 곳이 이 당산성이 아닐까. 별신당 오른쪽에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 보았다. 잔디가 참 곱다. 산에 올라가는 길목에 은산 당산성 안내 표지판이 있다. 안내판은 아주 작다. 그냥 안내판에 성의 규모 정도를 적어 놓기는 했어도 성곽의 개념도라든지 성곽의 역사라든지 발굴 조사한 내용이라든지 하는 내용은 없다. 아직 역사적으로 고증되거나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나 보다.

충정공 면암 이상진 묘소에 올라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언뜻 이 부분이 외성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묘소 위에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서 별로 돌보지 않은 과수밭을 돌아보니 거기가 외성의 성벽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계속 산으로 올라가니 토성의 흔적이 보였다. 흔적이 미미해 아무나 성벽이라고 알아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 있다. 혼자서 성을 한 바퀴 돌면서 확인했다. 낮은 산이면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더욱 황량하다. 동벽을 돌고 북벽 위의 성위에 난 길을 걸으면서 보니 북쪽 부분이 잘 남아 있었다. 서쪽은 은산천이 있어 바로 절벽이므로 자연성벽이다. 서에서 남으로 돌아 내려오는 길에 운동기구들이 잡초 속에 묻혀 있었다.

지금은 흔적을 알아보기 어려워도 매우 중요한 요새로 쓰이던 때가 있었으리라. 이 성은 청양군 백곡리 두릉윤성과 함께 임존성을 공격하려는 나당연합군의 공격로를 차단하는 중요한 요새가 되었다고 한다. 반드시 임존성을 차지해야만 하는 나당연합군의 골칫거리가 됐을 것이다. 결국 힘이 다해 임존성이 함락될 때 두릉윤성과 함께 이곳 당산성도 함락되었을 것이다. 그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산성에 뼈를 묻었을까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너른 들판 한가운데 표고 60m의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쌓은 테메식 토성도 역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곳곳이 박물관이고 역사의 현장이다. 산성을 돌아보고 내려와서 다시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보았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올해는 소제라 볼 것이 별로 없고 내년에 대제이기 때문에 볼 것이 많다고 했다. 운동장에는 아직도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축제와 마을 잔치에 있고 나는 제례에 있다. 제대로 보려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여기서 밤을 지낼 생각을 해야 한다. 밤을 지낼 생각을 해야 제대로 볼 것이다. 운동장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별신당 앞에는 아직도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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