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아동 문학가 권정생 선생(1937년 9월  10일~2007년 5월 17일)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안동을 찾았다. 마치 소풍을 나서는 어린아이처럼 발걸음이 들뜨고 가벼웠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걸어 생가 입구에 들어섰다. 안내자가 길 양쪽에 늘어선 흙담을 가리켰다. 선생의 동화 ‘강아지똥’ 그림책의 모델이 된 담이라고 했다. 담장 위를 비추는 햇볕이 따스했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함께 느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하신 선생의 말씀이 불쑥 떠올랐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일본 도쿄 빈민가에서 출생한 선생은 학교 대신 골목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어린 권정생은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재봉기가게 점원 등을 전전해야 했다. 19세에 걸린 늑막염과 폐결핵은 평생 선생을 괴롭혔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죽게 해달라고 밤마다 하나님께 간청하곤 했다. 걸식하며 떠돌이 생활을 할 때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자신처럼 가난한 이들이었다. 선생은 29세 때 경북 안동 일직면 소재의 교회 종지기로 정착, 교회에서 제공한 문간방에 머물렀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1980년)후에야 지금의 생가 터에 흙집을 마련했다.

소문대로 생가는 담도 대문도 없었다. 단출한 집 구조가 선생의 심성을 짐작케 했다. 선생의 삶을 지켜봤을 느티나무 아래 평상이 있었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에 앉아 나물을 다듬던 어르신들이 선생 대신 방문객을 맞이했다. 선생과 동고동락했던 마을 분들이었다. 마치 선생의 동화 속 등장인물들을 만난 듯 설레었다. 그래서인지 생면부지인 그분들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 참 가난하게 살았심더.” 마을 사람들은 그가 그리 유명한 작가인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굴속처럼 컴컴한 집안을 일행은 줄을 서서 차례로 들어섰다. 낮은 천장에 머리를 찧을 뻔했다. 두어 평 남짓이나 될까? 부엌 겸 서재이며 침실인 단칸방이 전부였다. 세상에나! 이렇게 누추한 방이 선생의 집필실일 줄이야! 나는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동안 식탁 한 귀퉁이에서 옹색하게 글을 쓰기에 좋은 작품이 안 나온다고 투덜거렸던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만의 쾌적한 작업실을 갖고 싶었던 로망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환경이 안 좋다는 탓을 일삼았던 나는 얼마나 허망한 꿈을 꾸었던 것일까?

조그만 누에고치 하나에서 비단 실 몇 미터를 뽑아낸다고 한다. 이 좁은 방이 순간 위대한 문학작품을 잦아낸 커다란 누에고치로 보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일본강점기, 한국전쟁, 정전 이후의 삶을 문학으로 풀어내시다 가셨다. 외로운 노인, 거지, 바보, 늙은 소, 깜둥바가지, 벙어리, 전쟁고아 등 외롭고 소외된 주인공들을 통해 한 시대를 증언한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었다. 수많은 옥고를 품고 키워낸 이곳이 선생 작품의 자궁인 양 아늑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는 질문에 “좋은 글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이다.”라고 했던 선생. 곳곳에 선생의 손때가 묻어있는 듯했다.

해맑게 웃고 계신 선생의 영정 앞에 국화를 비롯한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묵념을 올렸다. 새삼 남기신 유언장이 떠올랐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선생은 신장결핵, 방광결핵을 앓다가 급기야는 전신에 결핵이 번져 생사를 넘나들었다. 병마 때문에 독신으로 살았지만, 선생은 자신의 소망을 이렇게 익살스럽게 남겼다. 웃음 끝에 애잔함이 밀려왔다.

선생은 죽기 전에 좋은 작품 하나 남기고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평생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필사적으로 글쓰기에 매달렸다. 그렇게 이어온 필력 40여 년. 선생을 삶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희망을 담은 작품 활동이었다. 선생은 당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살던 곳 언덕에 뿌리고, 집도 깨끗하게 태워 자연에 돌려주라는 글을 남겼다. 선생의 유지를 다 따르지 않고 생가를 남겼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안내자가 “선생의 유품을 정리할 때 큰 액수의 돈다발들이 집안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고 했다. 의문이 생겼다. 선생은 해마다 인세가 일억여 원이나 들어오는 스테디셀러 작가였다. 굳이 이런 참혹한 가난을 겪어내실 필요가 무엇이었을까?  

가난 속에서도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선생은 자발적 가난을 몸소 실천하셨다. 일평생을 한국판 소로우의 삶을 사신 분이었다.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TV 프로그램 PD, 유명인사들, 종교인들, 정치인들이 만남을 청했으나 선생 댁의 문지방을 넘지 못했다. 세상과 유리된 채 철저하게 궁핍한 삶을 살다 가셨던 분, 삶과 글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선생의 인생을 되새기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당신이 쓴 책들은 주로 어린이가 사서 보는 것이니 모두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유지를 받들어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창설되었다. 생가를 나와 폐교를 개조한 권정생어린이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관 시청각실에서 선생의 생애를 영상으로 보았다. 자연스레 선생의 소년소설 ‘몽실언니’가 떠올랐다. 몽실이와 선생의 생애가 겹쳐져 떠올랐다. 선생 자신의 간난하고 신산했던 삶을 여성 주인공으로 바꾸어 표현한 듯했다.

문학관을 나와 ‘몽실언니’가 쓰인 무대와 배경을 둘러보았다. 실제와 소설 속의 내용이 꼭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생생하게 현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책 속의 몽실이가 되어 다리를 절뚝거리며 밭에서 김을 매고, 산을 넘어 개가한 엄마를 찾아갔다. 이웃집 할머니와 소꿉친구를 만나고, 동생 난남이를 업고 젖동냥에 나서기도 했다. 순식간에 ‘몽실언니’를 다시 읽은 것 같았다.

권정생 선생의 생가를 다녀온 후 나는 한동안 권정생 앓이를 했다. 내가 게을러지거나 방만함에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강박처럼 선생의 낡은 생가가 떠올랐다. 선생의 꾸지람이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그래서 가끔은 차라리 선생의 생가를 다녀오지 말 걸 그랬나? 하는 회한이 들기도 한다.

선생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움츠린 생명들에게 사랑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사랑이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두 손을 다 펴서 내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삶에 속절없이 흔들릴 때면 권정생 선생의 생가를 찾아 느티나무 그늘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바람결에 전해지는 선생의 소리 없는 격려와 위로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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