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경 희  < 논설위원 > 수필가

아내가 원치 않은 성행위를 강요한 남편에게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 지난 30년 간 부부 사이의 성폭행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 판례를 뒤집는 획기적 판결이다. 부부 사이 강제 성추행도 유죄라니, 사건의 제목만으로도 장안이 떠들썩하다.

부부 사이에서도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결정이다. ‘성적자기결정권’이란 말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성생활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다. 부연하자면 원하지 않는 상대와의 성관계를 거부할 권리라고 하겠다.

1970년 3월 대법원은 이혼의사 등이 없는 정상적인 부부사이에서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했다. 부부는 결혼으로 정조권(貞操權)을 포기한다는 의사를 표시했기에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판결이후 그것을 근거로 부부사이의 강제추행은 죄로서 성립되지 않았다.

아내 성추행 남편 유죄

그러나 법원이 처음으로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함에 따라 부부 성폭행도 형사처벌을 할 수 있는 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제 아내도 마음대로 했다가는 형사처벌 받는 겁나는 세상이라며 한탄하는 남편들의 반응이 이번 사건의 흥미를 더해 준다.

부부간 성폭행의 가장 일반적인 사례가 구타 후 성폭행이다. 그밖에 배우자가 원치 않는 변태적 성행위를 강요하거나 별거나 이혼소송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배우자를 성폭행하는 경우들이 일반적인 통계에 포함된다.

이러한 극단적 경우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부부싸움 후 원치 않는 부부관계를 남편의 강요에 의해 당했다는 호소를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아내를 제 소유물로 보는 가부장적 사고가 빚어낸 바로 잡아야 할 악습이다.

그렇다면 다소 무리한 성관계 시도가 모두 성폭행이냐는 반론이 나온다. 그래서 “가슴을 스친다거나 엉덩이를 만지는 등 단순한 신체접촉만으로 부부간 강제추행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며 일반인보다 추행정도가 훨씬 심해야 부부간의 성추행”이라는 재판부의 세세한 설명이 따랐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보비트 사건이라는 남편상해 사건이 있었다. 남편의 상습적인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보비트라는 여인이 남편의 성기를 절단한 엽기적 사건인데 남편이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이 사건 때문에 전 미국이 들썩였다고 한다.

보비트의 성기 절단 사건이 범죄 행위인가 아니면 자기 방어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법적 공방에서 배심원들은 무죄를 판결했고 이 사건으로 보비트는 남성의 성적학대에 시달리던 미국 여성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보비트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내기 위해 힘을 모았던 보비트 지지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의사를 행동으로 표시했으니 그들이 입고 있는 T-셔츠에 남성의 치부를 그려 넣는가 하면 ‘나는 창녀보다 더 해요’라는 문구를 새기기도 했다.

어두운 폭력 근절돼야

보비트의 무죄판결은 그 충격이 상당해서 남성의 폭행위협에 직면한 여성들이 가위를 드는 시늉만 해도 상대남성이 감히 힘을 행사 못했다는 말이 한동안 돌았다고 한다. 아무튼 여성들이 남성의 강압적 폭력에 저항하는 힘이 만만치 않을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던 사건이었다.

1984년 미국 뉴욕법원은 혼인증명서가 남편이 아내를 강간해도 형사처벌 되지 않는 면죄증명으로 파악해선 안 된다고 판결함으로써 부부 사이의 성추행죄를 인정했다. 이탈리아, 영국, 독일 등도 부부강간죄를 도입하고 있으나 부부간의 문제를 법이 아닌 두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이 아직까지 보편적인 정서인 일본은 혼인이 실질적으로 파탄 난 경우에만 부부간의 성폭력을 처벌하고 있다.

부부생활은 지극히 은밀한 사생활이지만 그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어두운 폭력은 단호히 근절돼야 마땅하다는 것이 이번 판결에 대한 반응들이다.
이제 “제 아내라고 마음대로 했다가는 큰일난다”는 표어라도 안방에 붙여야 할 일이 생기는 게 아닌지, 이래저래 남성들이 긴장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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