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이백(李白)은 당(唐)나라 때 시인으로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710년 서역과 무역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을 촉 지방에서 보냈다. 20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돌아다녔다. 이때 도교(道敎)에 심취해 상의산(象宜山)에 은둔하며 학문을 배웠다.

어느 날 이백은 공부에 싫증이 났다. 그 길로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기이하게 여긴 이백이 물었다.

“할머니,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오.”

“아니 도끼로 바늘을 만든단 말씀입니까?”

이백은 너무 어이가 없어 크게 웃었다. 그러자 노파가 이백을 쳐다보며 냉엄한 말투로 말했다. 

“젊은이,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오. 내가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 있는 거라오.”

이 말을 들은 이백은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 글공부에 전력을 다했다. 그 무렵 현종은 젊고 예쁜 양귀비를 총애하여 먹고 마시며 향락을 즐겼다. 매일 반복되는 노래에 싫증을 느껴 새로운 가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을 찾도록 했다. 이때 하지장(賀知章)이라는 신하가 이백(李白)을 천거했다. 현종은 이백의 시를 보고 탄복하여 즉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28살의 이백은 자신이 바랐던 벼슬자리가 이루어졌다고 기뻐했다. 그 기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 어찌 시골에 묻혀 살 사람인가. 이제야 호탕하게 웃으며 집을 나서노라.”

이백은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하지만 매일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시를 읊으며 지냈다. 이는 그 직무가 포고문 초안을 마련하거나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시를 짓는 일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어용 문학인 노릇을 한 셈이었다. 결국 이백은 사직하고 고향 산동으로 돌아가 도교에 입교하였다. 명산대천들을 두루 다니며 시를 써내려갔다.

이 무렵 당나라는 더욱 부패해졌고 안록산의 난으로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때 이백은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안록산 잔당 토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그만 숙종에게 역모로 간주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다행히도 중앙 관직에 남아있던 선비들의 도움으로 겨우 사면되었다. 이후 세상을 방랑하다가 나이가 들어 친척 이양빙에게 의지하며 지냈다. 그곳에서 나이 63세에 병사하였다. 이때 ‘산중문답(山中問答)’ 등 낭만적 풍류의 1천1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는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에 있는 이야기이다.

마부작침(磨斧作針)이란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이다. 즉 이루기 힘든 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교훈으로 쓰이는 말이다. 갑자기 이루어지는 일은 불행 외에는 없다. 봄에 씨를 뿌렸다면 한 해의 결실을 위해 차곡차곡 마무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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