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읍장에서 거래되는 쌀은 거개가 양평에서 생산되는 소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평의 쌀과 곡류를 틀어막는다면 청풍도가의 거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목구멍이었다. 쌀과 곡류는 사람들이 매일처럼 먹어야하는 식량이었다. 풍원이가 그런 생필품을 손아귀에 쥐고 조정할 수만 있다면 청풍도가로서는 오른팔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풍도가의 오른팔 뿐 아니라 왼팔까지도 묶으려면 도화리·학현리·연론리·단리에도 집산소와 전을 두어야 했다.

단리는 청풍읍장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단리의 놋장골에는 놋그릇을 만드는 유기촌이 있었다. 유기는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부터 농악기나 절집에서 쓰는 불구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는 무궁했다. 더구나 청풍에는 예전부터 사대부가 양반들이 많아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이들은 위세 못지않게 격식도 대단하게 따져 놋그릇이 아니면 밥상을 받지 않았다. 밥상뿐 아니라 조상님 제사를 올릴 때도 모든 제기를 놋그릇으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여느 평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놋그릇에 메와 탕을 담지 않으면 근본도 모르는 천한 것들로 치부되었다. 그러다보니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조상님을 모시느라 놋그릇 몇 벌씩은 장만해놓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청풍 관아에는 일년내내, 사시사철 벼슬아치나 행세깨나 하는 양반님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청풍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관아의 객사나 한벽루에는 이들을 접대하느라 갖가지 산해진미와 풍악이 연일 끊이지를 않았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도 모두 반짝반짝한 놋그릇이었다. 절집에서도, 마을제를 올릴 때도, 풍물에도 놋장골에서 만드는 용기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니 청풍에서 놋그릇 수요는 대단했다. 청풍도가에서는 놋장골 유기장들의 모든 생산품들을 도거리해서 자기들의 유기전에서만 독점으로 팔아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안성맞춤만 유기가 아니었다. 일반 중질이 양반들은 안성유기가 좋다고들 했지만, 상질 양반들은 사람들은 청풍의 놋장골 유기들이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 했다.

그것은 이런저런 일로 청풍에 와 접대를 받았던 영감과 대감들이 한양으로 올라가 입소문을 냈기 때문이었다. 한양에서도 알만한 집안에서는 청풍현감을 통해 놋장골 유기를 맞춰 쓰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얼마 전부터 관아 벼슬아치들과 청풍도가가 결탁하여 한양의 고관대작들만을 위한 놋그릇을 특별히 만들어 납품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청풍도가나 청풍관아에서 그런 놋그릇을 돈을 받고 팔리는 만무했다. 그것은 상납이었다. 그리고 상납을 한다면 분명 그만한 대가를 바라고 벌이는 짓이었다. 풍원이는 놋장골에 전과 집산소를 차려 청풍도가에 공급되는 놋그릇을 끊어버릴 작정이었다.

청풍관아 관할 내에서 생산되는 물산들을 막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물품들을 막으려면 인근 큰고을과 고을이 연결되는 길목도 단도리를 해야 했다. 연론리가 그런 마을이었다. 연론리는 청풍에서 수산 쪽으로 십리쯤 가다 다시 남서쪽으로 오리 못미처에 있는 마을이었다. 연론리는 제비골·무대이·마실·상길리·영개·안말·큰길가·갱그터·호무실 등 여러 부락들이 모여 한 마을를 이루고 있었다.

큰길가 마을은 예전부터 원님이 넘어가는 큰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큰길가는 청풍원님이 충주목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하는 길목이었다. 청풍에서 충주나 단양으로 가려면 연론리 큰길가를 지나 가파른 정심령 고개를 넘어야했다. 고개가 얼마나 험했던지 재를 넘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 해서 갱그터라 부르는 작은 마을까지 있었다. 정심령 고개는 예전부터 장사꾼들 왕래가 많고 관아에서는 멀리 떨어져있어 산적들이 숫하게 횡횡하는 곳이었다. 산적이 들끓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과 물산들이 많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정심령을 넘으면 서창이 나오고 그 길로 한수를 지나 황강으로 해서 안보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살미를 거쳐 노루목만 통과하면 곧바로 충주였다. 안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단양으로 통한다. 연론리는 청풍에서 충주와 단양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청풍에서 소비되는 많은 물산들과 물품들은 육로인 정심령길을 통해서 유입되었다. 청풍도가를 고립시키려면 육로의 숨통인 연론리에도 전과 집산소를 차리는 것이 당연했다.

교통 요지일뿐만 아니라 연론리는 담배가 특산물이었다. 넓은 들이라는 뜻을 지닌 연론리 무대이들에서는 질 좋은 담배가 무진하게 생산되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