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는 향교가 있다. 그래서 교리라 불리었다. 본래 물태리에 있던 향교가 교리로 옮겨진 것은 선조 연간이었다. 교리는 금수산의 암봉들이 수석처럼 이어지며 흘러내리다 구릉을 이룬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남한강 물줄기가 마을을 휘돌아 감으며 흐르고 있다. 뒤로는 험준한 산세가 마을 앞으로는 강물이 막고 있어 논밭이 있기는 하지만 논보다는 밭농사가 주업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상님 제삿날이나 돼야 쌀밥을 구경한다고 할 정도로 쌀이 귀했다. 그러나 토질이 좋아 대추·감·살구·고추·마늘이 유명해서 교리 밭작물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또 교리는 강변으로 끝없이 널려있는 초지에 소를 방목하여 소가 많기로 소문난 마을이었다. 또 가을이 되면 마을 뒤편의 금수산에서 송이가 지천으로 생산되었다. 교리는 북진과 지척거리에 있으면서도 물길로 밖에 오갈 수 없어 왕래가 불편했다. 그런데도 풍원이가 교리에 집산소를 내려고 하는 이유는 청풍읍장을 압박해서 청풍도가의 숨통을 죄기 위함이었다.

청풍 인근에서는 청풍읍장의 규모가 제일로 컸다. 따라서 주변 마을 사람들은 청풍읍장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물건들을 사고 팔았다. 청풍읍장에서 팔리는 물건들은 대부분 한양을 떠나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경강상인들의 짐배였다. 이 배에 실려 온 각종 어물과 수산물들은 보부상들이나 등짐장수들을 통해 청풍읍장으로 유입되고 현지의 각종 농산물과 임산물로 직교역 되었다. 특히 우시장이 유명하여 황석·한수·수산·덕산은 물론 멀리 원주에서까지 쇠살주나 소몰이꾼들이 몰려들어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우시장에서는 매우 큰 액수의 돈거래가 이루어졌다.

청풍읍장에서 이루어지는 소는 거의가 교리에서 키워지는 것들이었다. 교리 사람들은 소를 내다 팔고 얻은 돈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청풍읍장에서 구입해 살고 있었다. 만약 교리에 전을 내고 집산소를 만들어 물건을 내준다면 마을사람들이 불편하고 위험한 강을 건너 굳이 청풍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교리사람들이 소를 청풍읍장으로 가지고 갈 필요도 없고, 청풍읍장에서 가장 큰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우시장은 점점 위축될 것이 틀림없었다. 풍원이가 교리에 집산소와 전을 내려고 하는 의도가 거기에 있었다.

“물태리에도 내야 하나?”

풍원이가 순갑이에게 물었다.

“나중에야 모르겠지만 우선은 물태리는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순갑이가 물태리에 집산소와 전을 내는 것을 미뤄두자고 했다.

물태리는 청풍부가 자리한 곳이었다. 금남루·금병헌·응천각·팔영루·한벽루·객사 같은 관아 건물이 즐비하고 사대부가의 기와집이 늘르리하고 각종 전들이 늘어서있는 명실공히 청풍의 중심지였다. 물태리는 곧 청풍고을이었다. 청풍읍장도 닷새마다 여기에 섰고, 이들을 관장하는 청풍도가도 이곳에 있었다. 청풍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었다. 풍원이도 그곳에 전과 집산소를 내는 문제는 꺼려졌다.

청풍도가에서도 자신들의 도가 일원도 아니면서 누군가 들어와 장사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경계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풍원이가 청풍도가와 맞부딪친다면 그것은 쥐가 고양이에게 대드는 것이나 같았다. 잠자고 있는 호랑이 수염을 뽑는 것이나 다름없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일을 자초해 스스로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려,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여.”

순갑이도 무모한 짓이라며 말렸다.

풍원이도 대거리를 할 정도로 힘을 키우기 전에는 일단 물태리에 내는 것은 피하기로 했다. 그 대신 양평과 도곡에 전과 집산소를 내기로 했다. 양평과 도곡은 청풍읍 남서쪽 비봉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었다.

양평리는 청풍읍내와는 떨어져 있었지만, 청풍 일대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마을은 크게 양평과 후평으로 나뉘어졌는데, 양평에는 양지편·음지편·호장골·사려울·안말로, 후평에는 노가리·웃말·아랫말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을 규모와 걸맞게 논밭도 넓어 벼·보리·밀·수박·참외 같은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다.

특히 땅콩은 해마다 생산량이 오천 섬을 넘어 수확기가 되면 이를 사려는 사람들로 마을은 성황을 이루었다. 타작할 때가 되면 한양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어물과 소금을 지고와 벼와 잡곡류를 맞바꾸며 동네가 흥청거렸다. 양평의 넓은 뜰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아니었다면 많은 청풍 고을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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