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이광(李廣) 장군은 한나라 효문제 때 사람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원숭이처럼 팔이 길어  그 무렵 활쏘기의 명수였다. 집안 대대로 활쏘기가 전통이나 그의 자손이라도 심지어 어느 누구라도 궁술로써는 이광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활쏘기는 남과 달랐다.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보더라도 명중시킬 수 없으면 수십 보 이내라도 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쏘았다하면 활시위 소리와 동시에 목표물이 쓰러졌다. 전쟁에 참여하여 궁술로 사로잡거나 참수한 흉노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번은 효문제가 행차할 때 이광이 수행을 맡았다. 뒤따라오던 수레에 호랑이를 실었는데 그 우리가 부러지면서 호랑이가 튀어나왔다. 그때 이광이 호랑이와 맞서 싸워 때려죽였다. 효문제가 그것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대단하도다! 만일 고조 유방께서 살아 계셨다면 그대는 만 호의 봉읍을 받는 제후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루는 이광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숲 속에 번쩍이는 눈빛을 보고 호랑이로 여겼다. 내가 먼저 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집중해 화살을 당겼다. 화살은 명중하여 깊숙이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기에 호랑이가 죽었나 보다하고 확인하러 가보니 그건 바위였다. 놀랍게도 화살촉이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다시 제자리에 와서 몇 번의 활을 쏘았으나 끝내 화살촉은 바위에 박히지 않았다.

이광은 성품이 청렴해 어느 자리에서고 재물에 관해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흉노를 물리친 공로로 인해 황제로부터 상을 받으면 항상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음식을 먹어도 부하들과 같은 것을 먹었다. 죽을 때까지 40여 년간 봉록 2천석 관리로 있으면서 집에는 모아 둔 재산이 전혀 없었다.

또 이광은 말이 적고 어눌했다. 부하들이나 친구들과 놀 때에도 활을 쏘아 멀고 가까운 것을 비교해 벌주를 먹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로지 활쏘기를 좋아해 그것으로 일생을 마쳤다.

이광이 병사들을 이끌고 행군할 때에 식수와 식량이 떨어졌다. 얼마 쯤 걸어가자 냇가가 보였다. 병사들이 모두 물을 실컷 마실 때까지 이광은 냇가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병사들이 다 마신 후에야 물을 마셨다. 또 병사들이 음식을 다 먹고 난 후가 아니면 이광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자신에게 가혹하고 남에게 관대했다. 그런 까닭에 병사들이 그를 경애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광이 우북평군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들은 흉노는 그 후 수십 년간 감히 나타나지 못했다. 그들은 이광을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높여 불렀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있는 이야기이다. 사석위호(射石爲虎)란 호랑이인 줄 알고 활을 쏘았더니 알고 보니 화살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는 뜻이다. 정신을 집중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어느새 가을바람이 찾아왔다. 올해 이루고자 한 일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열심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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