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가 조 영 의

조용하던 산이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럽다. 같은 예초기지만 일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후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저씨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성큼성큼 산을 가로 지르며 잔디를 깎아 놓는다.

그 옆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하여 엉거주춤 돕고 있는 조카가 불안하여 바라보고 있는 내가 더 힘이 든다. 시끄러움도 그렇지만 빙글빙글 빨리 돌아가는 칼날 앞에서는 주눅이 드나보다. 예초기는 빠른 만큼 빈틈도 없다. 낱개 개성은 사라지고 하나의 통일이 된다.

무릇 꽃이 그대로 베어져 버렸다. 예초기 앞에서는 꽃도 풀이 된다. 그래서 낫을 몇 개 준비했다. 농사를 짓지 않으니 일년에 한번 정도 사용하는 낫이다. 숯돌에 갈아왔지만 잘 들리 없다. 부분 부분 녹슨 것이 보인다.

그래도 나무로 된 손잡이에서 평온을 얻는다. 좀 느리고 거칠면 어떠리.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듯 앉아 잔디를 깎아보지만 쉽지 않다. 자꾸 헛손질이다. 다시 예초기가 생각난다.

문명의 이기 앞에 정신의 허약함이 풀처럼 쓰러지고, 식구들은 자연스럽게 납골당과 화장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그러나 결론은 없다. 한 번 보고 덮어놓는 신문처럼 잠깐의 흥분은 가을볕 속으로 타들어 갈 뿐이다. 누군들 고향을 잃고 싶겠는가.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음인지 내년엔 과일 나무를 더 심어야 겠노라며 백발이 성성한 오빠가 먼저 일어선다. 하나 둘 자리를 뜨고, 난 씨감자 크기 만한 친정아버지 봉분을 등에 대고 누웠다. 아버지 마음을 풀어내어 키운 듯한 잔디는 따사로웠다.

조심스럽게 깎아 놓은 잔디를 쓸어 내렸다. 마치 아버지 머리를 빗겨주는 기분이었다. 시원하신 가요. 기분이 좋으신 가요.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돌아가신 아버지 봉분을 빗질 해준다. 벌초하는 날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