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서기 25년, 광무제는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이다.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대손이며 본명은 유수(劉秀)이다. 신(新)나라 말기에 농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유수는 녹림군에 참여하여 반란을 주도했다. 곤양 전투에서 3천명의 병력으로 40만의 신나라 대군을 격파하자 천하에 그 명성이 알려졌다. 이후 하북에서 100만 대군을 거느리며 천하의 강자로 떠올랐다.

당시 유수가 신나라를 이길 수 있었던 힘은 병법에 능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방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신나라 왕망은 자신의 군대만 믿고 강력한 권력을 갖고자 했다. 호족들을 억압하자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이들이 모두 유수에게 돌아서자 왕망은 한순간 지지 기반을 잃어 대패했던 것이다. 이후 유수는 신나라 멸망에서 교훈을 얻어 지방 호족들과 화합하여 후한 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물론 천하를 통일하기까지는 각 지역을 점령한 세력들과 10여년이 넘게 싸워야 했다. 그래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에서 유수는 가장 많은 전투를 한 사람으로 꼽힌다. 유수가 후한을 재건했을 무렵 천하는 사분오열되어 장안을 점거한 유분자, 농서를 점령한 외효, 촉을 지배한 공손술, 수양을 점거한 유영, 노강을 점령한 이헌, 임치를 지배하는 장보 등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외부에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천심과 민심은 유수의 편이었다. 그가 군대를 독려하여 경쟁자를 하나씩 정벌하니 천하통일의 과업이 차츰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농서 지역과 촉 지방만은 아직 그의 권한 밖이었다.

그 즈음 농서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외효는 세력이 약했다. 양다리 외교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그것은 유수와 친교하고 공손술과도 화친하여 전쟁을 억제하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힘의 균형이 작은 관계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외효가 죽자 그 아들이 광무제에게 항복함으로 농서 지역은 유수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유수가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심경을 표현하였다.

“농서의 성이 함락되자 곧바로 남쪽으로 군대를 돌려 촉나라 오랑캐들을 공격하게 하다니, 참으로 나는 만족을 모르는 자로다. 권력이란 그 욕심이 끝이 없구나. 이미 농서를 평정했는데 다시 촉을 바라게 되니 말이다. 결국 그렇게 쉬지 않고 군사를 출전시켰으니 내 머리가 희어진 것이 아닌가!”

나중에는 결국 촉을 무너뜨려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 유수는 황제의 재위기간 동안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성실히 그 직무를 보았던 인물 중 하나이다. 또 고조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하면서 황제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일등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하지만 유수는 황제에 오르자 공신들뿐만 아니라 항복한 이들에게도 상당한 지위와 명예를 부여하는 회유정책을 써서 성공한 군주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득롱망촉이란 농서 지방을 얻고 보니 그 옆에 촉 지방도 탐이 난다는 뜻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세상살이는 적당한 때에 만족한 줄을 알아야 화를 피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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