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어떤 이는 나를 재미있는 사람으로 안다. 또 어떤 이는 나를 어려워한다. 또 어떤 이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긴다. 뭐 사는게 다 그런 거겠지만, 난 사람 사귀는 것이 어렵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설령 아는 이들과 함께 있다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러니 일명 아재개그 또는 말장난을 일삼는 것인데,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시를 쓴답시고 누구는 나를 시인이라 불러주는 이도 있다. 그것도 민망하다. 누군가 너는 왜 시를 쓰냐고 묻는다. 할 말이 있어서라고 멋지게 대답을 한다. 그런데 나는 말로 할 수 없는 말을 왜 글로 쓸까? 최근의 고민이다. 인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낸 언어, 글을 가지고 시라는 것을 쓴다. 글자들의 조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어차피 읽어주는 이도 없는 글을.

이런 잡스러운 고민을 붙잡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도예가라 부르니 도예가로 소개하는 이를 만났다. 그와 그의 예술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인터뷰는 순탄치 않았다. 어제의 숙취가 채 풀리지 않은 탓이지만 그의 상태는 나보다 더 심했다. 갑자기 찾아온 존재에 대한 허무함(?)으로 밤새 우주를 유영했다. 몇 해 전부터 오며가며 봐온 터이지만, 서로의 숙취를 공유하며 그의 작업실에 마주 앉아 있자니 느낌이 다르다.

그도 나처럼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딱히 스스로에 대해 자랑하지도 않고 작업에 대한 설명도 길지 않아 이야기는 차가 식는 속도보다 짧았다. 풀과 꽃도 존재의 의미가 있을 것인데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를 안고 그는 흙과 불을 만진다. 그래서 나는 그를 흙과 불을 만지는 이로 호명하기로 한다.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예술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연주를 하고 글을 쓰고 또 무엇인가를 한다. 나는 수많은 행위와 창작물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단지 예술가의 표현 양식에 대해 존중할 뿐이다. 난 그와 대화를 나눈 적 없으니 그의 삶과 고민에 대해 알지 못함으로 나의 무식함은 무죄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흙과 불을 만지는 이로부터 내 고민의 출발점을 다시 확인했으니, 이제 그의 작품을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말았다.  

한 길을 오래 걸어온 이는 그 길이 보인다. 도력이 높은 이는 누군가의 작품을 보면, 그가 진솔한 이인지, 경박한 이인지, 겸손한지,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창작물 속에 창작자의 삶이 보인다는 의미이다. 난 흙과 불을 만지는 이로부터 어떠한 창작물도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배웠다. 그러니 더더욱 나의 심장은 눈보다 귀보다 손보다 빨라져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나 스스로 세상을 버렸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흙과 불을 만지는 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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