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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나무 서기]신조어 유감
유병숙 수필가
2017년 09월 10일 (일) 20:10:08 충청매일 webmaster@ccdn.co.kr
   
   

‘밤이 깊었네. 밥은 먹었니?’ 연구소에서 밤샘 작업하는 딸에게 카톡을 보냈다.

‘마더 혜레사, 혼밥’ 답장이 마치 공작원 접선 문자 같다.

풀이하자면 연기자 김혜자의 이름을 걸고 판매하는 편의점도시락을 지금 혼자 먹고 있다는 말이다. GS25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김혜자 도시락’은 인기가 있어 ‘마더 헤레사’, ‘혜자 푸드’, ‘갓 혜자’로 불리고 있단다. ‘편도족’ 딸답다. 편도족, 즉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인스턴트식품 먹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나의 잔소리에 딸은 며칠 전 편의점 도시락 몇 종류를 사가지고 왔다. 전기렌지에 살짝 데우니 정말이지 금방 차려낸 밥 같았다. 메뉴마다 반찬이 서너 가지라 간단한 식사로는 별반 손색없어 보였다. 저렴한 가격에 골라 먹는 재미까지 있다고 딸이 너스레를 떨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식재료도 많이 개선되었단다. 일단 마음이 놓였다.

‘국물이 없어서 어째?’

‘푸라면’

‘신라면’을 곁들여 먹고 있단다. 엄마의 채근에 길게 답할 기운도 없나 보다. 나는 지레 카톡을 멈춘다.

‘타임 푸어, 안뇽’

자신은 시간에 쫓기고 있다, 엄마는 걱정 마시고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로 알아듣는다. ‘힘내’하고 카톡을 맺는다.

바쁘다며 말이 점점 줄던 딸은 요즘 들어 부쩍 낯선 문자를 많이 쓰고 있다. 그나마 평소 딸아이의 상태를 잘 알고 있기에 이해 가능했다. ‘버가충’, ‘눈팅’, ‘볼매’, ‘노잼’, ‘먹튀’, ‘듣보잡’, ‘꿀잼’, ‘넘사벽’, ‘귀요미’, ‘안물’ 등의 말을 처음 문자로 받았을 땐 우주 밖 외계인과 소통을 하는 기분이었다.

전에는 생소한 신조어들을 아이들에게 묻곤 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무시당한 듯한 열등감마저 들었다. 괜스레 화가 났다. 세종대왕님께서 얼마나 고생해서 만든 신성한 한글인데…. 운운하며 투덜대기도 했다. 지금은 난무하는 신조어 더미에 깔려 허우적대면서도 인터넷을 찾아보며 곧잘 낄낄 웃곤 한다.

하긴 신조어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오렌지족’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신기해하던 기억이 새롭다. ‘사오정’ ‘오륙도’ ‘삼팔선’ 등의 말들이 남편에게도 적용될까 봐 가슴 졸이기도 했다.

‘촛불 정국’ 소식으로 어수선할 때 엄마는 그만 낙상을 하고 말았다. 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겠냐마는 엄마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더란다. 한 번 주저앉은 다리는 이내 걷지를 못하고, 급기야 일어나 앉지도 못하게 되었다. 의사도 원인을 몰라 쩔쩔매다가 꼬리뼈에 금이 간 것 같으니 꼼짝 말고 누워 계시라고 했다. 엄마와 나의 어쩔 수 없는 동거가 시작되었다.

엄마는 우리 집 거실에 당신의 환자 침대를 설치하라더니 하나밖에 없는 텔레비전을 독차지했다. 리모컨을 쥔 자가 그 집안의 최고 실권자라는 말이 있지만, 리모컨 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엄마는 곧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아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오락프로를 보고 있을라치면 “거 ‘최순실 쇼’ 좀 틀어봐라!” 하신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 영문을 몰랐다. 알고 보니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을 실시간으로 쏟아내고 있는 뉴스 또는, 시사 프로그램으로 채널 좀 돌리라는 말이었다. 엄마의 엉뚱한 비유에 큰 웃음이 터졌다. 그날 이후 한동안 우리 집에선 ‘최순실 쇼’가 그칠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 ‘쇼’를 감당하기 어려운지 엄마의 표정은 나날이 어두워졌다. ‘최순실 쇼’는 그야말로 웃지 못할 신조어가 되었다.

대선정국이 되자 대통령 후보들은 신조어를 내뿜기 시작했다. 문재인 후보는 ‘어대문’, ‘이대문’, ‘안모닝’, ‘안슬림’을, 홍준표 후보는 ‘안찍박’, ‘문찍김’을, 안철수 후보는 ‘홍찍문’, ‘문모닝’, ‘문슬림’을 각각 피력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알고 보니 단순한 언어조합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상대를 공격하는 말들이었다. 신조어는 특성상 긍정적 의미보다 네거티브 속성을 지니게 된다. 고양된 시민의식을 온 마음으로 체득했던 나는 품격 높은 경쟁을 보여주길 열망했다.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신조어를 듣고 싶었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의 멋진 연설이 떠올라 아쉬움으로 남았다.

언어는 어쩔 수 없이 그 시대를 아우른다. 그 생겨남을 막을 수도 없지만, 시간과 상황이 종료하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단다. 그래서 철 지난 말을 아재말, 줌마말이라고 놀리기도 한다.

요즘에는 ‘헬조선’, ‘고나리자’, ‘월급고개’, ‘월급 로그아웃’, ‘쉼포족’, ‘취준생’, ‘공시오패스’, ‘티슈 인턴’, ‘달팽이 족’ 등의 신조어가 회자하고 있다. 신조어는 어쩌면 바쁘고 삭막한 일상을 견뎌내는 하나의 언어유희일 것이다. 보다 활기차고 긍정적인 언어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신나는 나날을 기대하며, ‘사이다’를 외쳐본다.

아침에 미국에 사는 남동생으로부터 ‘지금 혼술 중’ 이라는 문자가 당도했다. 비가 내리면 고향이 더 생각난단다. 신조어로 향수를 달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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