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이맘때가 되면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와 문학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홍명희문학제가 열린다. 홍명희와 그의 소설 ‘임꺽정’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문학제가 벌써 스물두해째를 맞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홍명희의 고향인 충북에서 홍명희와 그의 소설은 설 자리가 없다. 올해도 충북이 아닌 경기도 파주에서 개최된다. 홍명희문학제는 충북작가회의와 사계절출판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행사로 그간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소설 ‘임꺽정’은 우리 현대문학사 특히, 대하소설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저자인 홍명희 역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혼란한 시대에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그러나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아픔 속에서 결국, 북에 남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홍명희’라는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홍명희와 소설 ‘임꺽정’은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다.

얼마 전 북한은 6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위기 속에 놓여 있으며, 통일의 길은 멀기만 하다. 만약, 있어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1950년 6월처럼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나처럼 관심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는 보수와 진보 두 세력의 투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보수를 뭐라 단정 지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더 좋은 환경, 전쟁 반대, 평화, 비핵화, 비정규직철폐, 민주주의, 인권, 불평등 해소 등 소수가 아닌 우리 모두의 행복을 바라는 이 대부분이 진보의 세력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진보의 목소리는 불편하다. 

1945년 해방기에도 새로운 세상을 꿈꾼 이들이 많았다.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 수많은 이가 선택의 갈림길에 섰으며, 그로 인해 많은 희생을 겪어야 했다. 그중 홍명희는 남도 북도 아닌 하나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의 생이 그러했다.

봉건주의의 붕괴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우리의 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많은 좌절과 허무함을 느꼈을까. 남과 북에 각각의 정권이 들어서고 이념을 달리하는 많은 이들은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정권 유지를 위해 죄 없는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단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었다고 나도 모르게 어느 한쪽 편이 되어버리거나 적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다.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예술가를 블랙리스트로 규정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감시의 대상이자 제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비록, 이념의 장벽 앞에 빨간딱지가 붙어 버렸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인물 홍명희는 위대하다. 소설가로서도 위대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의 생에 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소설 ‘임꺽정’이 한국문학사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죄짓는 사람처럼 문학제를 열고 있지만, 절대로 자본과 권력 앞에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지도 손을 빌리지 않는다. 올해도 통일문학을 꿈꾸는 홍명희문학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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