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백제 마지막 왕자인 부여융(扶餘隆, 615~682)이 패망에 앞서 피신했던 암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계룡산 신원사 고왕암이다. 고왕암에 왕자가 몸을 감추었던 굴(융피굴)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라의 패망과 함께 만인의 선망인 왕자가 피신해야만 했던 비운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 고왕암 가는 길에 신원사를 들러 부처님께 먼저 삼배를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지나는 길에 들렀던 신원사는 남다른 인상을 심어주었다.

경내를 살펴보는데 마음이 고왕암에 있었기에 큰 절은 오히려 건성건성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는 곧 후회한다. 이왕이면 자세히 조금 더 성의를 가지고 보는 것이 후에 다시 오지 않아도 되었던 교훈을 거듭 새김질한다. 경내는 다듬고 가꾼 흔적을 찾기 어렵다. 참배객은 많다. 설 끝이라 부처님께 세배라도 드리려는지 대중이 이렇게 많은데 마당에는 행자들의 수행의 흔적이라 아름다워 보이던 싸리비의 빗살무늬는 보이지 않는다.

대웅전에 들렀다. 참배객이 법당에 가득하다. 백팔 배인지 삼천 배인지 끝없는 절 공양을 올리는 신도들이 연신 들어오고 나간다. 이럴 때 스님 한 분이라도 오셔서 나지막하게 목탁소리라도 내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하기에 따라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는데 스님의 염불을 바라 무엇 하겠는가. 내가 읊조리는 노년의 옹알이만으로도 고해의 강을 건너는 배가 되고, 법당 뒷산 새소리가 다 번뇌로부터 일깨우는 목탁소리라 여기면 되는 일이다. 일체유심조인데 게으른 염불이나 목탁소리만 못하겠는가 생각하니 원망하는 마음도 사라졌다.

모자를 벗고 옷깃을 여미었다. 부처님을 우러러 삼배를 올렸다. 대웅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의자왕 때 창건하여 신라 말에 도선이 중창했고, 조선 태조 때 왕명에 의해 무학대사가 중창한 후 명성황후의 후원으로 보련화상이 중창했다고 한다. 범종각 뒤에 고려시대의 지은 것으로 알려진 오층석탑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법당 앞에 있는 오층석탑이 문화재로 지정된 줄 알았는데 정작 보물은 범종각 뒤에 숨어 있었다. 봄이 되면 꽃이 피어 주변이 아름다울 수도 있겠지만 현재는 어쩐지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도 없고 낙엽이 쌓인 속에 찾아오는 이도 없이 천년 이끼를 입은 채 그대로 서 있다.

생각에 이 절에서 중악단 외에 아름다운 전각으로 범종각을 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범종각은 그리 오래된 건물 같지는 않았으나 아름다움으로 치면 중악단에 버금갈 것이라 생각되었다.

중악단은 조선 태조대왕의 명으로 무학대사가 지어 왕실의 기도처로 내려오다가 폐사된 것을 고종 때 명성황후의 서원으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내려온다고 한다. 신원사에서는 해마다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천도재를 지낸다고 한다. 건물은 지난 세월만큼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웠다. 중악단에 참배하려다 들어 들여다보기만 하고 그만 두었다. 묘향산에 상악단, 계룡산에 중악단, 지리산에 하악단이 있었는데 중악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신원사는 계룡산 4대사찰 중에 하나인 남쪽 절이다. 허물어진 채 그대로 있는 담장을 지나 눈 녹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고왕암으로 올라가는 마음이 왠지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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