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남편의 눈가에 발갛게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예상했던 대로 선고를 받아 놓은 친구의 부고를 알리는 전화였다. 노란 나트륨등이 채 꺼지기 전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세상을 놓아버린 친구의 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주검을 보지 못했던 때에는 살아 있을 때 잘 사는 것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가니 이젠 죽는 일도 잘 사는 일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들어 남편 주변이나 내 주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많아졌다. 그만큼 남편과 나도 한 해 한 해 죽음의 문 앞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남기고 가는 야속한 사진 한 장과 그리움을 보며 나도 내 주검을 위해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어느 잡지에서 본 우스갯소리에도 언제 어느 때 갑자기 죽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늘 속옷을 잘 챙겨 입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자가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면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속옷을 보고 병원을 골라서 데려다 놓는다고 한다.

의미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내가 죽었을 때 나를 대변해 줄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어떤 집에 사는지 사는 형편은 어느 정도인지는 정말로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옷차림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평소에도 속옷을 잘 갖추어 입고 바른 몸 매무시를 해야 한다고 하나 보다.

세월이 좋아지다 보니 자신의 주검도 미리 예견해보는 임종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죽음에 대비해서 미리 써두는 유언장도 있다. 태어나는 일만큼 사후에 치러지는 행사가 복잡해지면서 비싼 장례예식장도 생겼다. 그러면서 뜨기 시작한 ‘장례지도사’란 직업이 요즘은 인기 직종이라고 한다. 옛날 같으면 천하다고 무시하고 쳐다보지도 않았을 직업이다.

복잡해진 장례문화 덕분에 새로운 인력창출을 할 수 있는 장례지도사란 직업이 주목받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아무리 직업이라고 해도 죽은 사람의 몸을 단장하고 화장시켜 주고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당당함과 책임감이 있었다. 죽은 사람도 인간으로 대하며 예의를 갖추어 모셔 드리면 유족들도 고마워해서 뿌듯하고 오히려 보람된 일을 하는 것 같아 자랑스럽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20세기 정신 의학자이며 사상가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곳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놀 거에요.”라고 했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인생 수첩’은 우리가 이 지상에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일깨운다.

엘리자베스는 “죽음이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상실이다.”라고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녀가 남긴 말 가운데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삶이라고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말은 매 순간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78세의 나이에 그렇게 은하수로 춤추러 떠났다. 40년 동안 삶과 죽음을 화두로 삼은 연구자답게 그녀의 장례식도 독특했다. 그녀의 관 앞에서 두 자녀가 작은 상자를 열었을 때, 상자 안에서는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날아올랐다. 조문객들이 미리 받은 종이봉투에서도 수많은 나비가 파란 하늘로 날았다.

호스피스 활동을 하며 환자들을 돌볼 때 스스로 유체이탈 등 다양한 신비 현상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몸은 나비가 날아오르는 번데기처럼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임을 확신했다. 그녀가 가진 사상의 상징인 나비. 그녀가 드디어 번데기에서 부화해 나비가 되어 죽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인들은 그녀의 마지막 여행을 축복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말이다. 누구나 영원할 것 같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거역할 수 없는 약속이며 삶의 한 부분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며 호스피스 활동하던 엘리자베스도 그가 찬양하던 죽음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장례지도사가 정성 들여 입관준비를 마친 지인의 얼굴은 감정 없는 밀랍 인형 같다. 윤회설을 믿자면 영혼이 빠져나가고 육신만 남아 있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연옥을 떠돌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남은 자들의 모습이 처절하다. 죽은 자를 위해 무엇을 빌어줄 것인가.

평소에는 화장(化粧)했을 리 없는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발라 주고 깔끔하게 면도까지 마친 젊은 장례지도사는 주검 후의 모습을 보면 생전에 고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 살아가며 풍기는 향기 못지않게 주검 후에도 나를 무서워할 사람이 없도록 늘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겠다. 내가 죽고 난 후에 남은 사람들이 나를 그리워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행복이랴.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