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주성 변호사

우연히 기사를 검색하던 중 ‘2002년에 낳아서 엄마가 미안해’라는 제목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2002년이라 하면 개인적으로 대학의 신입생으로 첫발을 내딛은 의미 있는 해이기에 과연 무슨 일이지라는 생각으로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해당 기사의 요지는 2002년도에 태어난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치루는 연도의 입시 개편안과 관련된 혼란스러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제 기억한편에 잠자고 있던 불편했던 혼란스러움의 감정을 다시금 소환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제 또래라면 기억하실 수 단어 소위 ‘이해찬 1세대’를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소위 하나만 잘하면 대학갈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부르짖으며 기존 수능위주의 입시의 전환점에 서서 그 변화를 몸소 체험했던 1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의 혼란스러움에 대한 오래된 기억은 다시금 소환되어 기사를 읽으며 어느 덧 격한 공감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공감은 무분별하게 방향을 틀어버리는 교육정책의 비일관성 속에 저 또한 한명의 피해자였다는 동조의식에서 기인합니다.

가치적 판단은 성숙한 사회에서 양자택일의 문제가 합리적 조화의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의문이 없습니다. 교육의 영역도 예외는 아닐 것임에도 사실상 가치적 조화의 문제를 양자택일 적으로 변화시켜 정권의 이념이 바뀌면 마치 기존 것은 오답이고 정답을 찾겠다는 식의 태도로 급작스럽게 변경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극히 의문입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을 오직 입으로만 강조하면서 그 시스템에 대해서는 정권에 맞게 그때그때 급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극히 의문입니다.

그러한 교육정책 속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학생들의 혼란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물론 그들이야 혼란은 잠시지만 좋은 시스템이라는 허황된 말로 소위 퉁치기를 하려고 할 테지만 말입니다. 굳이 멀리 찾지 않아도 적어도 제 경험에 의하면 소위 ‘이해찬 1세대’의 교육정책은 소기의 목적 달성은커녕 대형 참사만 빚어졌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목표아래 추진된 수시전형은 이제는 소위 모든 것을 다 잘해야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모순된 제도로 변질 된지 오래입니다. 그렇게 모순된 제도는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도록 그나마 환경이 구비된 서울과 지방 혹은 다른 교육격차가 발생한 환경 속에서 고스란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왜곡된 대입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즉 교육기회의 평등이라는 기치아래 기존 통로를 폐쇄하고 성급하게 만들어낸 제도들이 소위 기형화를 거쳐 출발선에서조차 불평등이라는 대형 참사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또 정권이 바뀌었으니 교육제도에 급히 손을 댑니다. 그 속에서 대학을 가야만 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혼란에 놓이게 될지 아슬아슬합니다. 아마도 그토록 새 교육부 장관의 신념에 바탕을 둔 절대평가제도를 도입하고 싶기는 한가 봅니다. 그 제도에 거센 반발에 부디치니 국어, 수학은 상대평가를 유지하는 마치 신화 속 반인반수를 도입해서 소위 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그들의 궤변 속에 애꿎은 피해자만 양성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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